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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의 1.

큰애 입학 때 만큼은 아니지만, 둘째의 입학도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 있다. 환경이 바뀌면 나도 모르던, 혹은 잊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새삼 깨닫는 나는 참으로 계획주의자에 완벽주의자다. 사적인 영역은 대충대충 되는대로를 선호하지만, 이것이 공적인 영역이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반복적으로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한다. 열 가지를 계획해서 아홉 가지를 하는데 꼭 한 가지를 놓친다. 그리고 집에 오는 내내 그 한 가지를 자책하는 습성이 있다. 사실 그 한 가지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별 생각 없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지난 주에는 시간표를 완벽하게 주차별로 짜놓고 햇갈려서 태권도를 못 보낸 거랑, 이번 주는 자고 일어나 뒷머리가 뜬 것을 못 눌러주고 보낸 거다. 진짜 별 거 ..

주름 - 파코 로카

나이듦에 따른 몸과 뇌에 오는 노화. 요양원 생활을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만화로 표현했다. 슬픔이나 괴로움 우울함 보다는 아쉬움의 감정이 더 진하게 남은 것은 기억이 단편적으로 끊어진 필름처럼 이어지기 때문이리라. 얼마 전 부모님과 사돈어르신과 식사를 하였는데 일흔이 되신 분들이 사십대인 우리에게 그 때는 한창이다 젊다 사오십대에 운동을 해 두어야 한다 조언해 주셨다. 원래 미리 사서 고민하는 성격이지만 부모님의 노후, 나의 노후에 대해 생각이 많아진다. 마지막 즈음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하지 않도록 많이 잠들고, 자주 끊기고, 몽환적인 세상이 되는 것은 뇌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마취제일까.

개학 전.

둘째가 6년 다닌 어린이집에 편지와 정성을 담아 보내고 혼자 또 마음이 찡했다. 지난 시간이 스치고 지나간다. 기어다니던 아이를 유모차 태워 등원하던 첫 날부터 중간에 학부모 운영위원회도 하고 여러 사건도 있었으나 아이를 건강하게 함께 키워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운 좋게 둘째가 동네 돌봄센터에 당첨되고 큰 애는 영어 학원 1주년을 맞아 3단계나 월반하여 시간표가 완전 뒤집어져서 다시 짜느라 한참 걸렸다. 각 학년에 맞는 준비물 챙기고 챙기고, 빠른 성장으로 옷도 다시 챙기고 퀘스트가 줄을 잇는다. 둘째가 하교 후 혼자 학원이나 돌봄센터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입학 후 3월 적응기에 같이 있어줄 수 있어 다행이다. 학교에 가면 실수해서 혼날 게 걱정된다는 아이에게 엄마가 3월 내내 같이 데리고 가고 데리러 ..

한 달 휴가

세어보니, 2018년에 두 달 안식휴가였고 2021년에 연중에 못 쓴 휴가를 모아 한 달 쉬었고 2023년에도 작년 휴가 남은 거 모아서 한 달 쉰다. 이 때 쓰려고 고이 모셔둔 안식휴가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이 때 쓰려고 남겨둔 육아휴직도 네 달 남아 있는데 올해 말이면 다시 안식휴가가 한 달 나온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가진 휴가가 너무 많아서 그런데 두 달 쉬어도 되냐 물으니 한 달까지는 어떻게 버텨보겠지만 두 달은 안되겠다고 거절당했다. ㅎ 이제 다들 자리 잡고 일 잘 해서, 나 없이도 꽤 잘 굴러갈 것 같지만, 그래도 있어주길 원하니 있어줘야겠다 싶었다. 남은 휴가/휴직을 다 못 쓰고 날릴 가능성도 있겠다 생각했다. 공백 전에 이리저리 일을 정리하다보니 숨가쁘게 바쁘다. 휴가 들어가기 전에 식..

성공의 경험 누적.

아이는 보수적이고 관성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하던 것을 그만두는 것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을 불편해 했다. 저학년 때는 강권하며 밀어붙여야만 시작할 수 있었지만, 막상 해보면 어렵지 않고 재미도 있는 경험이 쌓이며, “너는 뭐든 잘 할 수 있다.” 라는 설득이 통하기 시작했다. 이번 방학 특강으로 새로운 종류의 운동을 시작했다. 설득과 대화의 과정이 한참 필요하리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생각보다 흔쾌히 주 3회 하겠다고 했다. 첫 주는 배에 멍도 들고 이런 저런 시행착오가 있는 것 같더니 둘째 주를 마무리 하며, 드디어 물구나무서기도 했다며 “지금까지 한 운동 종류 중에 제일 재미있어!” 라고 했다. 감개무량하고, 솔찬히 들어간 수강료가 아깝지 않았다. 새로운 것들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할 수..

바쁘게 안정.

근래 제일 추운 날, 혹한을 뚫고 아침에는 추천 받은 프로그램으로 집 근처 센터에 다녀오고 점심에는 최근 거의 올출하고 있는 필라테스를 다녀와서 오후에는 오랜만에 운전해 그녀들을 만나고 왔다. 저녁 설겆이 후에, 가스레인지와 주방후드도 청소했다. 고생했다 이제 좀 쉬어라 하는 생각이 들지 않냐 하는데, 정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떻게 쉬나. 바쁘고 성실하게 살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된다.

눈오는 날 아침.

병원 정기검진으로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후다닥 따라온다. 엄마랑 같이 가겠다고 평소보다 20분이나 일찍 길을 나서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말한다. “엄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빨리 나온거야.” 눈이 제법 내리고 길에도 많이 쌓였다. 모자 쓰고 뛰어갈거라며 우산을 안 챙긴 아이에게 “엄마가 학교까지 우산 씌워줄까? 혹시 엄마랑 같이 가면 부끄럽나?” 하고 물었더니, 되려 엄마 병원 시간 괜찮냐 물으며 우산 안으로 들어온다. 싸락눈이 머리 위 우산에 부딪치며 토도도독 소리가 난다. 신호를 기다리며 아이가 머리를 슬쩍 기대며 웃는다. 안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으니 여기까지만 한다는 의미다. 미끄러질까 하얀 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손이 움찔거린다. 눈을 만지고 싶은 아기와 귀찮은 게 싫은 어린이..

오랜만

사회 초년생 시절에 가장 깊이 와닿았던 ‘사람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가장 큰 안정감을 얻는다,’ 는 구절을 요즘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있다. 공부도 운동도 오랜만에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 손이 덜 가게 된 덕이다. 웬만하면 주 5일 운동을 하는데, 오랜만에 쓰는 근육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반갑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장거리 산책을 한다.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은 책 보고, 나는 공부한다. 스터디 일정에 맞춰 달리느라 늦은 밤에 책을 보고 있으니 큰애가 책갈피에 엄마 힘내라고 응원 문구를 써준다. 성실한 것, 일정을 맞추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발전한다는 느낌에 안정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