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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가에서.

한동안 벼랑 끝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폭풍우 사이 평온한 수면에 누웠다가 한숨이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길가였다. 길 밖으로 나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이 길 하나만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간에 있고 싶은 것은 들꽃이 흔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찰나의 기분 좋은 감각을 이미 알아버려서 이것들을 놓고 살 수 있을까 싶어서.

연민과 두려움.

“나 요즘 인피니트가 좋아.” 라고 말했다. 신랑은 “다행이다. 좋아하는 게 있어서.” 라고 답했다. 그렇게라도 삶에 낙을 가지는 것이 좋다며 남자 아이돌 좋다는 와이프를 한심해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따뜻한 표정이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 함께 산책과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친정 들렀다 올테니 먼저 올라가 플스하라고 권했다. 단칼에 거절하더니 단호하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요즘 흉흉한 일이 많아 혼자 가는 것 하지 말라고. 조용한 주택가. 걸어서 10분 미만. 아직 해가 떠 있었다. 곧 알게된 지 20년이 된다. 나도 그에게, 그도 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며 연민을 느낀다. 존재에 감사하며,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아포칼립스적인 우울감이 덮쳐오는 시국을 살아내 보자..

3년 만에 재택 종료.

사연과 감정과 이야기가 섞여 어지럽던 순간에도 흘러가는대로 두자. 결국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오르락 내리락 했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재미있다. 집과 회사가 가까워서 통근도 그리 어렵지 않고 익숙한 사람 새로운 사람 만나 대화하는 것도 좋고 점심 끼니마다 달라지는 메뉴에 카페 음료도 맛있고 맥북에 스티커 붙이는 과정도 즐거웠고 퇴근 후 운동하는 루틴도 깨지지 않아 안정되었다. 회사 안에서만 일하라는 기조를 받들어 퇴근 후에는 일하지 않게 되니 오히려 업무량이 줄었다. 재택 내내 밤에도 새벽에도 수시로 일하던 걸 그만 두었다. 노트북 가방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멈추었으니 날 시원해지면 걸어 다닐수도 있으리라. 인생에 나쁜 것만 있지는 않다.

변화.

이십대 때랑 마음은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은데- 라고 했더니 무슨 말이야. 너는 그 때 질풍노도의 시기였어. 지금은 어른 됐지. 니가 생각해도 그 때로 돌아가기 싫을걸? 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요 몇 주 울렁거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왜 이 단점은 고쳐지지 않나 고민했었는데 지금이 아주 많이 나아진 거였다. 이십대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완전 사람 된거다. 그걸 잊고 있었다.

아니 왜?

휴가를 내어 건강검진을 하고 신랑과 점심 맥주 음료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한 시간여를 걸어 동네로 돌아와 둘째를 찾아 귀가한 뒤 미용실을 갔다가 충동적으로 외출복 그대로 운동을 갔다. 복근을 부여잡고 시계를 보니 큰 애의 운동 수업 시간이기에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날렵하고 우아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멋있었다. 대놓고 계속 보면 애가 싫어할까 싶어 흘끔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밤길을 손 잡고 산책하다 물었다. 아까 엄마가 운동하는 거 쳐다봐서 싫지 않았어? “아니 왜? 세계 최고의 미녀가 보는 건데. 좋지~~”

사람은 사람으로

생각이 많았던 며칠. 생각을 이리 했다 저리 했다 고쳐봤다 되돌려봤다. “그래도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고 애정을 주면서 살아갈거야. 바뀌지 않을거야. 그냥 알아만 둬.” 라던 신랑의 조언과 “그러게 나만 좋아하라니까.” 라던 그녀의 농담으로 방황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복귀 후 처음으로 회사에 간 날. 예비군 훈련으로 px에서 사 왔다며 선물을 받았다. 다녀온 지 좀 된 걸로 아는데, 사다놓고, 사무실 잘 안 나오는 내가 오면 주려고 책상에 남겨 두었던 거구나. 그간 어지러웠던 마음이 위로를 받았다. 여러 부침과 고민은 물론 계속 지나가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은 사람으로.

그 때 행복했을거야.

한 달 동안 애들 수발들며 집안일하다보니 틈틈이 온라인 쇼핑도 자주 한다. 사야 했는데 바빠서 못 챙기던 생필품을 쟁이다보면 미끼상품에도 현혹된다. 가 보고 싶었던 속초 롯데리조트 키즈룸 특판을 잡아 평일을 끼워서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큰애가 8살 때 탔던 삼척 레일바이크를 둘째가 8살 때 다시 갔는데 둘 다 기억을 전혀 못 했다. 여러 번 묵었던 삼척 쏠비치를 초면처럼 느끼는 아이들과 밤길을 산책하며 물었다. 이렇게 다 기억이 안 나는데, 어릴 때 여행 가는 건 의미 없는 게 아니냐고.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때의 나는 행복했을거야. 어릴 때 행복해서 지금 내가 성격이 좋잖아. 이번 여행도 행복해.“ 큰 아이의 대답이 감동적이었다. 큰 위안과 보람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 일을 하고 집을 챙기고 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