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281

길가에서.

한동안 벼랑 끝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폭풍우 사이 평온한 수면에 누웠다가 한숨이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길가였다. 길 밖으로 나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이 길 하나만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간에 있고 싶은 것은 들꽃이 흔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찰나의 기분 좋은 감각을 이미 알아버려서 이것들을 놓고 살 수 있을까 싶어서.

그 때 행복했을거야.

한 달 동안 애들 수발들며 집안일하다보니 틈틈이 온라인 쇼핑도 자주 한다. 사야 했는데 바빠서 못 챙기던 생필품을 쟁이다보면 미끼상품에도 현혹된다. 가 보고 싶었던 속초 롯데리조트 키즈룸 특판을 잡아 평일을 끼워서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큰애가 8살 때 탔던 삼척 레일바이크를 둘째가 8살 때 다시 갔는데 둘 다 기억을 전혀 못 했다. 여러 번 묵었던 삼척 쏠비치를 초면처럼 느끼는 아이들과 밤길을 산책하며 물었다. 이렇게 다 기억이 안 나는데, 어릴 때 여행 가는 건 의미 없는 게 아니냐고.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때의 나는 행복했을거야. 어릴 때 행복해서 지금 내가 성격이 좋잖아. 이번 여행도 행복해.“ 큰 아이의 대답이 감동적이었다. 큰 위안과 보람이 되었다. 아이를 낳고 일을 하고 집을 챙기고 현실..

오전 5시.

오전 5시. 신랑의 기상 알람이 들린다. 출장이라 조금 더 자겠다고 신랑이 다시 눕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야지 하며 방을 나가는 큰 애의 목소리가 겹쳐 들린다. 어제 하교 후 숙제 한다는 아이를 놀자고 꼬여내어 산책하고 돌아다녔다. 엄마랑 놀게 학원도 째자고 했다가 거절당했다. 밤이 되니 그 날 해야 할 숙제를 다 못 끝마쳤는데 너무 졸리다고 괴로워하던 아이가, 다음 날 일찍 일어나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본인 하루 고생했으니 웹툰 연재 올라온 것 10분만 보고 자겠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그게 오전 5시 일줄은 몰랐다. 마음에 걸려 똑똑 두드려보니 책상에 앉아 열심히 쓰고 있다. 혼자 할래 엄마가 옆에 누워있을까 하니 옆에 있어주는 게 응원 받는 기분이란다. 아이 방 침대에 누워- 형광등이 눈이 ..

10분의 1.

큰애 입학 때 만큼은 아니지만, 둘째의 입학도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 있다. 환경이 바뀌면 나도 모르던, 혹은 잊고 있던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데, 새삼 깨닫는 나는 참으로 계획주의자에 완벽주의자다. 사적인 영역은 대충대충 되는대로를 선호하지만, 이것이 공적인 영역이 되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반복적으로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을 한다. 열 가지를 계획해서 아홉 가지를 하는데 꼭 한 가지를 놓친다. 그리고 집에 오는 내내 그 한 가지를 자책하는 습성이 있다. 사실 그 한 가지가 크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아이는 별 생각 없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지난 주에는 시간표를 완벽하게 주차별로 짜놓고 햇갈려서 태권도를 못 보낸 거랑, 이번 주는 자고 일어나 뒷머리가 뜬 것을 못 눌러주고 보낸 거다. 진짜 별 거 ..

개학 전.

둘째가 6년 다닌 어린이집에 편지와 정성을 담아 보내고 혼자 또 마음이 찡했다. 지난 시간이 스치고 지나간다. 기어다니던 아이를 유모차 태워 등원하던 첫 날부터 중간에 학부모 운영위원회도 하고 여러 사건도 있었으나 아이를 건강하게 함께 키워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운 좋게 둘째가 동네 돌봄센터에 당첨되고 큰 애는 영어 학원 1주년을 맞아 3단계나 월반하여 시간표가 완전 뒤집어져서 다시 짜느라 한참 걸렸다. 각 학년에 맞는 준비물 챙기고 챙기고, 빠른 성장으로 옷도 다시 챙기고 퀘스트가 줄을 잇는다. 둘째가 하교 후 혼자 학원이나 돌봄센터로 이동할 수 있도록 입학 후 3월 적응기에 같이 있어줄 수 있어 다행이다. 학교에 가면 실수해서 혼날 게 걱정된다는 아이에게 엄마가 3월 내내 같이 데리고 가고 데리러 ..

한 달 휴가

세어보니, 2018년에 두 달 안식휴가였고 2021년에 연중에 못 쓴 휴가를 모아 한 달 쉬었고 2023년에도 작년 휴가 남은 거 모아서 한 달 쉰다. 이 때 쓰려고 고이 모셔둔 안식휴가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이 때 쓰려고 남겨둔 육아휴직도 네 달 남아 있는데 올해 말이면 다시 안식휴가가 한 달 나온다. 같이 일하는 친구들에게 가진 휴가가 너무 많아서 그런데 두 달 쉬어도 되냐 물으니 한 달까지는 어떻게 버텨보겠지만 두 달은 안되겠다고 거절당했다. ㅎ 이제 다들 자리 잡고 일 잘 해서, 나 없이도 꽤 잘 굴러갈 것 같지만, 그래도 있어주길 원하니 있어줘야겠다 싶었다. 남은 휴가/휴직을 다 못 쓰고 날릴 가능성도 있겠다 생각했다. 공백 전에 이리저리 일을 정리하다보니 숨가쁘게 바쁘다. 휴가 들어가기 전에 식..

오히려 좋아.

미래는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다. 이득을 더 얻기 위해 혹은 충동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보다 못 견디겠는 것이 아니라면 지속하는 것에 더 큰 의미를 둔다. 이러한 생각들은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봤을 때 많은 것들을 이뤘기 때문인지도. 결과론적으로 나는 지금 괜찮으니. 머무르고 지속했던 선택들을 합리화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순간 순간 최악이라 생각했던 것들도 놓지 않고 버티다보면, ‘오히려 좋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 크고 작은 돌부리들에 멈칫하고 넘어졌기 때문에 태풍을 피하고, 지름길과 오솔길을 발견할 수 있었으리라. 더 잘하려, 더 열심히 하지 않아도 된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할 수 있는 만큼 한다. 작은 즐거움과 보람에 집중해서 기쁨을 찾는다 예상대로..

외로움.

아이와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엄마도 늘 외로웠다고 말해주었다. 결혼하기 전에도 결혼해서도 종종 외로웠고 너희가 태어나 너무 바빠지면서 외로울 틈이 없어졌다고. 신랑을 플스와 위쳐의 세상에 남겨두고 아이 둘을 킥보드에 태워 서점으로 산책 가다가 좁은 길에서 서로 내 손를 잡겠다고 다투는 아들 둘을 보며 짜증내다 체념을 하고 또 다시 으르렁거리는 것을 보며 이 둘이 부모의 사랑을 경쟁하는 형제이기에 결국 생길 수 밖에 없는 결핍이 있을 거고 내가 노력해도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해줄 수 없을거고 그렇다면 엄마로서 해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생각하다. 고딩 때 젊은 베르데르의 슬픔에 빠져있었다던 신랑과 내 성향을 받은 아이라면 외로움과 공허를 결국 갖게 될거고 그것은 아이가 부딪치고 성장해가며 깨야 ..

연휴.

토일,월휴가,화삼일절 로 4일 짤막한 연휴다. 1. 엄마랑 다섯시간 정도 이곳저곳을 다녔다. 운전수, 말동무, 손 잡고 걷기, 몇 가지를 사드렸다. 딸이 있어 정말 좋다는 어머니께, “엄마 어쩌지 나는 딸이 없는데.”하며 웃었다. 동생과 전화를 하다가 위의 내용을 이야기했다. 누나는 딸이 없지만 너는 딸이 있어 좋겠다. 하다가. 귀염둥이 공주님은 나처럼/누나처럼 자라지 않고 지금처럼 생각없이 즐겁게 자랐으면 한다며 의견 일치를 보았다. 2. 카드게임 하고 싶다는 둘째에게 신랑이 잡혀버려서 큰 아이와 둘이서 산책을 나와 5km, 두 시간 정도 걸었다. 햇빛과 물결, 온갖 새들과 나무를 보다 고개를 돌리면 키가 많이 자라 이제는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눈이 마주친다. 내 보물 내 조그만 아기가 언제 커서 나의..

깎아.

사회 초년생부터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다. 네모지고 뾰쪽해도 그냥 언덕에서 굴러내려가며 이리저리 깎이고 깎여 동그래질거라 기대했다. 거의 20년을 굴러내려가다보니 많이 둥글어졌다. 그런데 피로파괴의 법칙을 피하지는 못 했다. 할 수 있게 된 것들이 많아졌지만 하고 싶지 않은 감정도 비례한다. 깎았는데 깎였다. 할 수 있는데 해야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