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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강릉 중앙시장에서 강릉역까지 25분 동안 스콜처럼 비가 쏟아지다 금방 쨍하고 해가 내리쬐며 습기 가득한 후덥지근함이 덮쳐왔다. 속도를 줄이지 않은 하얀 트럭이 빗웅덩이를 촤악 밟고 달려가며 물이 한바구니 다리에 쏟아졌다. 멈출 수 없다. 발을 재개 날리며 에어컨이 틀어져있을 역을 향했다. 소나기에 젖은 우산을 양산처럼 쓰고 몇 분 걸었더니 표면이 바삭하게 말랐다. 온몸에서 솟아오른 더운 열기가, 온실같은 뜨거운 기류에 둘러싸여 시야가 좁아진다. 지난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게 괴롭히던 망상같은 상상이, 수시로 떠올라 폐부에서부터 한숨이 세어나오던 그 장면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연속되던 그 고민들이 문득 어제 일처럼 아득하다. 몸이 편안하면 뇌가 활발하다. 몸이 힘들면 뇌가 멈춘다. 강박이 저 어둠 ..

지속가능한 나이듦. 정희원.

지속가능한 나이듦정희원 지음1.통계청 ‘2017년 국민이전계정’에 따른 생애주기 적자와 흑자 (2020년 12월 보도자료)* 28세가 되면 흑자로 진입해서, 45세에 최대 흑자를 거두고, 59세가 되면 다시 적자로 변한다.2.노화 방지에 확실한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것은 적게 먹는 것과 충분한 양의 신체 활동.* 쓴맛이 난다고 몸에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달콤한 맛을 내세운 것 중 이로운 것은 거의 없다.* 노화 지연의 기본 원리는 대부분 대사 과정을 가늘고 길게 뽑아주는 것의 이런저런 생물학적 기전을 모사하는 것.* ‘노화를 이기는 방법’은 30-60대에 걸친 기간 동안 절식잉나 절식을 모사할 수 있는 방법들을 실천하는 것* 요즘의 1980-1990년대생은, 질병을 야기하기 위해 매일 당분과 지방이 ..

람이 - 중1

1. 키가 커졌다. 발도 커졌다. 이제 키도 발도 나보다 크다. 겨우 중1에 따라잡힐줄은 ㅜㅜ 2. 신랑이 미국 출장으로 출국한 날, 회사에서 오랜만에 과음을 했다. 위스키에 연태에 해롱거리며 소파에서 잠드는 귓가로 아빠 없는데 혼자 자기 무섭다는 둘째의 칭얼거림과, 어휴 오늘만 같이 자 준다는 큰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보니 안방에서 둘이 자고 있다. 자기 방에서 문 꼭 닫고 혼자 자는 아이인데… 아빠 없고 엄마 술에 취해 쓰러지니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구나. 출근 준비 다 하고 차 키를 들고 일어나는데 이대로 운전하면 음주운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휴가를 내고 다시 누웠다. 방학이라 늦게 일어난 아이가 엄마 괜찮냐길래 해장라면 끓여줘~~ 하니 가장 예쁜 파와 계란를 넣는다고 말하며 끓여준다..

길가에서.

한동안 벼랑 끝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은데 폭풍우 사이 평온한 수면에 누웠다가 한숨이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길가였다. 길 밖으로 나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굳이 이 길 하나만 있는 것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중간에 있고 싶은 것은 들꽃이 흔들리고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찰나의 기분 좋은 감각을 이미 알아버려서 이것들을 놓고 살 수 있을까 싶어서.

람이 - 초졸. 사랑과 확신만 주자.

아이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교복을 맞췄다. 모바일 디바이스의 유혹을 이기기 어려워하며 공부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혼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너그럽게 감싸주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모른척해야 방치가 아닌 부드러운 훈육이 되는 걸까. 결정과 통보, 처분, 때로는 넘어가기. 선과 선을 타는 것이 어렵지만. 그래도 사랑과 애정표현, 몸과 마음의 스킨쉽은 유지하려 한다. 계속 아이와 사이 좋고 싶다.

서울이 7세 - 우리 돈 필요해?

일요일에 밀린 일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평일에 정리할 시간이 없는 23년 업무 성과 정리와 개인별 피드백, 24년 업무 계획 및 리소스 분배. 서울이가 찡찡거리며 들어와 묻는다. “엄마 왜 일요일에 일해? 왜 일요일에 해야 돼?” 일이 많아서~~ 라도 해도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해서 묻는다. 차가운 발을 만져달라며 감겨 오는 걸 안아 어루만지며 무의식중에 신랑에게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엄마 일요일에 일 한 것도 돈 나와~ 괜찮아.” 그러자 아기가 묻는다. “엄마 우리 돈 필요해?” 돈이 필요한 건 아닌데... 필요한 게 맞기도 하고... 수면 양말 신겨 담요 덮어 잠시 안아주니 바로 잠든다. 감기에 약기운에, 엄마 찾아 안아달라고 오는 아기. 잠든 아기 내려놓고 마저 일하러 왔다. 음... 일단은 이..

연민과 두려움.

“나 요즘 인피니트가 좋아.” 라고 말했다. 신랑은 “다행이다. 좋아하는 게 있어서.” 라고 답했다. 그렇게라도 삶에 낙을 가지는 것이 좋다며 남자 아이돌 좋다는 와이프를 한심해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따뜻한 표정이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 함께 산책과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친정 들렀다 올테니 먼저 올라가 플스하라고 권했다. 단칼에 거절하더니 단호하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요즘 흉흉한 일이 많아 혼자 가는 것 하지 말라고. 조용한 주택가. 걸어서 10분 미만. 아직 해가 떠 있었다. 곧 알게된 지 20년이 된다. 나도 그에게, 그도 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며 연민을 느낀다. 존재에 감사하며,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아포칼립스적인 우울감이 덮쳐오는 시국을 살아내 보자..

3년 만에 재택 종료.

사연과 감정과 이야기가 섞여 어지럽던 순간에도 흘러가는대로 두자. 결국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오르락 내리락 했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재미있다. 집과 회사가 가까워서 통근도 그리 어렵지 않고 익숙한 사람 새로운 사람 만나 대화하는 것도 좋고 점심 끼니마다 달라지는 메뉴에 카페 음료도 맛있고 맥북에 스티커 붙이는 과정도 즐거웠고 퇴근 후 운동하는 루틴도 깨지지 않아 안정되었다. 회사 안에서만 일하라는 기조를 받들어 퇴근 후에는 일하지 않게 되니 오히려 업무량이 줄었다. 재택 내내 밤에도 새벽에도 수시로 일하던 걸 그만 두었다. 노트북 가방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멈추었으니 날 시원해지면 걸어 다닐수도 있으리라. 인생에 나쁜 것만 있지는 않다.

수학 학원과 만화 카페

6학년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수학 학원을 등록했다. ebs 동영상 강의를 보며 만점왕을 성실하게 푸는 아이지만 채점이 밀리는 부모를 둔 탓에 케어는 잘 되지 않았다. 수학을 잘 한다는 아이의 자신감이 중학교에 들어가 선행한 아이들을 만나 꺾이지 않았으면 했다. 익숙하지 않은 것도 시도하게 하려 사교육을 활용해왔지만 사실, 잘 하는 걸 더 잘 하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수학 학원과 영어 학원 시간표가 충돌해서 미술 피아노 기타 드럼 수업까지 섬세하게 조정하다보니 혼자 시간표를 관리하는 대학생이 되는 날을 고대하게 됐다. 집에 와서 놀고 싶은데다 시간 분배가 서툴러 새로 늘어난 숙제들을 자정까지 푸는 아이를 보며 슬슬 만화카페에 데리고 가야겠다 싶었다. 알라딘도 도서관도 많이 가서 새로운 책이 거의 없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