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199

연민과 두려움.

“나 요즘 인피니트가 좋아.” 라고 말했다. 신랑은 “다행이다. 좋아하는 게 있어서.” 라고 답했다. 그렇게라도 삶에 낙을 가지는 것이 좋다며 남자 아이돌 좋다는 와이프를 한심해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따뜻한 표정이었다. 일요일 늦은 오후 함께 산책과 조깅을 하고 오는 길에 친정 들렀다 올테니 먼저 올라가 플스하라고 권했다. 단칼에 거절하더니 단호하게 같이 가자고 한다. 요즘 흉흉한 일이 많아 혼자 가는 것 하지 말라고. 조용한 주택가. 걸어서 10분 미만. 아직 해가 떠 있었다. 곧 알게된 지 20년이 된다. 나도 그에게, 그도 나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다. 서로를 안쓰럽게 여기며 연민을 느낀다. 존재에 감사하며,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아포칼립스적인 우울감이 덮쳐오는 시국을 살아내 보자..

3년 만에 재택 종료.

사연과 감정과 이야기가 섞여 어지럽던 순간에도 흘러가는대로 두자. 결국 더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다. 마음을 다스리면서도 오르락 내리락 했었는데 막상 나가보니 재미있다. 집과 회사가 가까워서 통근도 그리 어렵지 않고 익숙한 사람 새로운 사람 만나 대화하는 것도 좋고 점심 끼니마다 달라지는 메뉴에 카페 음료도 맛있고 맥북에 스티커 붙이는 과정도 즐거웠고 퇴근 후 운동하는 루틴도 깨지지 않아 안정되었다. 회사 안에서만 일하라는 기조를 받들어 퇴근 후에는 일하지 않게 되니 오히려 업무량이 줄었다. 재택 내내 밤에도 새벽에도 수시로 일하던 걸 그만 두었다. 노트북 가방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멈추었으니 날 시원해지면 걸어 다닐수도 있으리라. 인생에 나쁜 것만 있지는 않다.

변화.

이십대 때랑 마음은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은데- 라고 했더니 무슨 말이야. 너는 그 때 질풍노도의 시기였어. 지금은 어른 됐지. 니가 생각해도 그 때로 돌아가기 싫을걸? 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요 몇 주 울렁거리는 마음을 들여다보며, 왜 이 단점은 고쳐지지 않나 고민했었는데 지금이 아주 많이 나아진 거였다. 이십대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완전 사람 된거다. 그걸 잊고 있었다.

아니 왜?

휴가를 내어 건강검진을 하고 신랑과 점심 맥주 음료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한 시간여를 걸어 동네로 돌아와 둘째를 찾아 귀가한 뒤 미용실을 갔다가 충동적으로 외출복 그대로 운동을 갔다. 복근을 부여잡고 시계를 보니 큰 애의 운동 수업 시간이기에 처음으로 올라가 보았다. 날렵하고 우아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멋있었다. 대놓고 계속 보면 애가 싫어할까 싶어 흘끔거렸다. 수업이 끝나고 밤길을 손 잡고 산책하다 물었다. 아까 엄마가 운동하는 거 쳐다봐서 싫지 않았어? “아니 왜? 세계 최고의 미녀가 보는 건데. 좋지~~”

사람은 사람으로

생각이 많았던 며칠. 생각을 이리 했다 저리 했다 고쳐봤다 되돌려봤다. “그래도 당신은 사람을 좋아하고 애정을 주면서 살아갈거야. 바뀌지 않을거야. 그냥 알아만 둬.” 라던 신랑의 조언과 “그러게 나만 좋아하라니까.” 라던 그녀의 농담으로 방황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복귀 후 처음으로 회사에 간 날. 예비군 훈련으로 px에서 사 왔다며 선물을 받았다. 다녀온 지 좀 된 걸로 아는데, 사다놓고, 사무실 잘 안 나오는 내가 오면 주려고 책상에 남겨 두었던 거구나. 그간 어지러웠던 마음이 위로를 받았다. 여러 부침과 고민은 물론 계속 지나가겠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은 사람으로.

바쁘게 안정.

근래 제일 추운 날, 혹한을 뚫고 아침에는 추천 받은 프로그램으로 집 근처 센터에 다녀오고 점심에는 최근 거의 올출하고 있는 필라테스를 다녀와서 오후에는 오랜만에 운전해 그녀들을 만나고 왔다. 저녁 설겆이 후에, 가스레인지와 주방후드도 청소했다. 고생했다 이제 좀 쉬어라 하는 생각이 들지 않냐 하는데, 정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어떻게 쉬나. 바쁘고 성실하게 살고 있으니, 마음이 안정된다.

눈오는 날 아침.

병원 정기검진으로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후다닥 따라온다. 엄마랑 같이 가겠다고 평소보다 20분이나 일찍 길을 나서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아이가 말한다. “엄마랑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빨리 나온거야.” 눈이 제법 내리고 길에도 많이 쌓였다. 모자 쓰고 뛰어갈거라며 우산을 안 챙긴 아이에게 “엄마가 학교까지 우산 씌워줄까? 혹시 엄마랑 같이 가면 부끄럽나?” 하고 물었더니, 되려 엄마 병원 시간 괜찮냐 물으며 우산 안으로 들어온다. 싸락눈이 머리 위 우산에 부딪치며 토도도독 소리가 난다. 신호를 기다리며 아이가 머리를 슬쩍 기대며 웃는다. 안고 싶은데, 보는 눈이 많으니 여기까지만 한다는 의미다. 미끄러질까 하얀 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손이 움찔거린다. 눈을 만지고 싶은 아기와 귀찮은 게 싫은 어린이..

오랜만

사회 초년생 시절에 가장 깊이 와닿았던 ‘사람은 발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가장 큰 안정감을 얻는다,’ 는 구절을 요즘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있다. 공부도 운동도 오랜만에 다시 시작했다. 아이들이 많이 자라 손이 덜 가게 된 덕이다. 웬만하면 주 5일 운동을 하는데, 오랜만에 쓰는 근육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반갑다. 주말에는 아이들과 장거리 산책을 한다.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은 책 보고, 나는 공부한다. 스터디 일정에 맞춰 달리느라 늦은 밤에 책을 보고 있으니 큰애가 책갈피에 엄마 힘내라고 응원 문구를 써준다. 성실한 것, 일정을 맞추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발전한다는 느낌에 안정감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