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199

아빠의 전화와 네임펜.

친정은 남자들이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이다. 동생도 최소 주 1회 이상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아버지도 생각날 때마다 짧게 한두마디 하시고 끊으신다. 엄마랑 나는 전화를 잘 걸지 않고 종종 잘 받지도 못한다; 토요일, 신랑이 좀 쉬라며 애들 데리고 시댁에 갔다.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문신을 해볼까 이야기를 나누다 일단 네임펜으로 신랑이 팔목에 적어준 글자를 보며 뇌를 비우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드시고 싶다는 피자 배달시켜드리고 혼자 있다니 오라 하셔서 도보 7분 거리 친정에 가서 놀다가, “아빠 나 집에 데려다줘.” 하고 손 잡고 한 시간 산책했다. 문신은 절대 안된다고 생각도 하지 마라 하셔서 웃고 거주 동이 보이는 경비실 창문 앞에서 헤어졌다. 동생에게 오늘 밤에 엄마아빠랑 놀..

어머니와 이별.

중환자실은 하루에 한 번 한 명만 면회가 가능했다. 신랑이 말했다. 자기도 엄마 만나러 갈래? 휴가를 내고, 어머니를 뵈러 갔다. 면회 시간 20분. 의식 없이 코에 산소줄을 끼우고 누워계신 어머니 귓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앞으로도 남은 가족들에게 제가 잘 할게요 어머니. 제 시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애들이 결혼하면,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게요. 추위 많이 타시는 어머니 발이 차서 문지르고 주무르며 안겼다. 안아드리고 안겼다. 이불 꼭 꼭 덮어드리고 얼굴이랑 팔이랑 다 만졌다. 자유로를 타는 순간 전화가 왔다. 임종 대기하라고. 중환자실 앞 의자에 어머니의 삼남매를 두고, 아이들 데리러 혼자 밤길을 운전해 집으로 왔다. 장례식장 짐 챙기다 눈을 붙였다 뜨니 새벽 3시 반에 ..

시간을 꽉 차게.

병원에서 더이상 시도할 수 없는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 퇴원하시니 주말마다 찾아뵐 수 있게 되어 좋으면서도, 순간 울컥 울컥 올라오는 것들을 삼키기 어렵기도 하다. 만지고 귓가에 이야기들을 속삭일 수 있어 감사하지만,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듣기 어렵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지난 주 찾아뵙고 돌아온 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 만나뵈었을 때, 그리고 가장 최근에 어머니와 통화 했을 때, 함께 했던 많은 순간들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사적으로는 시어머니이시지만, 사회적으로는 워킹맘 선배님이기도 하셔서, 내면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고, 조언도 받았었다. 어머니를 못 뵙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나는 어디다 이런 속 이야기들을 하고, 애정과 공감을 ..

사랑이 이런 건가요~

0. 너무 집이랑 학교만 오고 간다며 답답하다는 아이를 위해 늦게 공원을 찾아 떠돌다가 주차장으로 돌아가던 밤길. 어떤 유아가 나를 보며 방긋 웃으며 한참 말을 걸다. 내 손을 잡고 걸어가던 큰 애가 “엄마. 저 애가 엄마를 자기 엄마인 줄 알았나봐. 역시 우리 엄마가 이뻐서 그런가봐.” 라며 다정하게 눈을 맞춰 온다. 1. 드레스룸 불편한 의자에서 연짱 회의를 며칠째 하다보니 여러가지 신경 쓰며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 몸살 기운에 어깨가 저릿하며 통증이 심했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 어깨가 너무 아프다 했더니 큰애가 팔을 주물러 주다. 손아귀 힘이 어른 못지 않다. 반대쪽으로 돌아 누우라는데 어깨가 아파 못 하겠다 하니 엎드리라고 하고, 본격적으로 안마를 하기 시작한다. 둘째는 형아 따라서 이리저..

엄마, 차라리 때려.

둘째는 여러 번 훈육해도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내 기준에 꽤나 심각한 것인데, 말로도 타이르고 엉덩이도 때려보고 여러 번 했는데. 오늘 저녁에 또 그랬다. 성질이 욱 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때리고 싶지는 않아서, 엄마는 너무 아프다 속상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러지 말자 타이르고, 아이는 미안하다고 울고 한바탕 정리를 하는 중에 다시 또 그러는 걸 보고,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랑 들어가 자라고, 엄마는 이따가 잘거라고. 오늘 네가 말을 안 들어서 같이 자지 않을 거라고 하니, 아이는 통곡하고, 옆에서 눈치보고 있던 큰애가 말한다. “엄마, 차라리 때려. 지금 엄마의 그 말은 쿡 찌르는 것 같아. 내가 애기 때 기억이 있어서 아는데, 애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랑 늘 같이 있어서..

마음의 감기를 치료하는 귤 꽃.

얼마 전, 사고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감기가 왔다. 아이들 챙기며 기다려주던 신랑이 해줄 거 없냐고 묻기에, 수면 부족과 두통이 나아질까 싶어 귤을 까달라고 부탁했다. 소파에 누워있는데 들려오는 신랑의 다급한 목소리. 자기야 빨리 먹어. 애들이 자꾸 집어 먹어서 없어진다! 애들도 먹고 나도 먹고 뭐 어때 하면서 식탁에 다가가 보니 자꾸 이가 빠지고 채워지는 귤 꽃이 피어 있었다. 놓은 모양이 예쁘니 한동안 귤 안 먹던 애들이 자꾸 집어먹고 신랑은 모양을 완성해서 주고 싶어서 다시 채워넣고 그 긴박한 순간이, 일상이, 감사하고 소중해서 웃음이 났다.

가을을 멀리서 보면 봄

다시 무기한 재택 근무가 시작됐다. 점심에 시간을 붙여 오프하고 혼자 산책을 다녀왔는데 시력이 나쁜 눈으로 흐릿하게 보니 개나리처럼 보이는 노란색이 가득했다. 가까이서 보면 거뭇하게 시든 잎이지만. 햇볕 아래 멀리서 보니 참 예뻤다. 겨울을 앞둔 가을이지만 햇살 아래 봄처럼 빛나는 날이 있다. 편찮으신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시들시들하게 느껴지는 내 삶도 멀리서 보면 저렇게 예뻐 보일 수도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