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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전화와 네임펜.

친정은 남자들이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이다. 동생도 최소 주 1회 이상은 전화로 안부를 묻고 아버지도 생각날 때마다 짧게 한두마디 하시고 끊으신다. 엄마랑 나는 전화를 잘 걸지 않고 종종 잘 받지도 못한다; 토요일, 신랑이 좀 쉬라며 애들 데리고 시댁에 갔다. 심리적 안정을 위하여 문신을 해볼까 이야기를 나누다 일단 네임펜으로 신랑이 팔목에 적어준 글자를 보며 뇌를 비우기 위해 끊임없이 글을 읽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드시고 싶다는 피자 배달시켜드리고 혼자 있다니 오라 하셔서 도보 7분 거리 친정에 가서 놀다가, “아빠 나 집에 데려다줘.” 하고 손 잡고 한 시간 산책했다. 문신은 절대 안된다고 생각도 하지 마라 하셔서 웃고 거주 동이 보이는 경비실 창문 앞에서 헤어졌다. 동생에게 오늘 밤에 엄마아빠랑 놀..

어머니와 이별.

중환자실은 하루에 한 번 한 명만 면회가 가능했다. 신랑이 말했다. 자기도 엄마 만나러 갈래? 휴가를 내고, 어머니를 뵈러 갔다. 면회 시간 20분. 의식 없이 코에 산소줄을 끼우고 누워계신 어머니 귓가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속삭였다. 앞으로도 남은 가족들에게 제가 잘 할게요 어머니. 제 시어머니가 되어주셔서 감사해요. 나중에 애들이 결혼하면, 어머니 같은 시어머니가 될게요. 추위 많이 타시는 어머니 발이 차서 문지르고 주무르며 안겼다. 안아드리고 안겼다. 이불 꼭 꼭 덮어드리고 얼굴이랑 팔이랑 다 만졌다. 자유로를 타는 순간 전화가 왔다. 임종 대기하라고. 중환자실 앞 의자에 어머니의 삼남매를 두고, 아이들 데리러 혼자 밤길을 운전해 집으로 왔다. 장례식장 짐 챙기다 눈을 붙였다 뜨니 새벽 3시 반에 ..

아홉수.

열아홉은 대학 1학년이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고, 열정과 기력을 학교에 쏟았다. 타인과 자신에 대해 고민하고 몰입하며 술과 함께 방황했다. 스물아홉은 첫 출산 후 육아휴직 중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개선할 수 없는 소중한 것을 받아들이며 깜깜한 어둠 속에 그래도 잘해보려 발버둥치며 좌절했다. 아홉수 라는 걸 떠올릴 냉정함이 없었던 시기들이다. 그런 단어는 다른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거라 생각했었다. 몇 주 전, 좋아하는 희님이 오랜만에 보자 연락를 주셔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이 사건들을 요약 전달하며 나이듦이란 이렇게 빡심을 견디는 건가봐요 했더니. 내 나이를 기억해주시는 그녀가- “화경, 아홉수인가봐.” 라고 말씀해주셨다. 그 순간 머리를 뎅~ 하고 울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슬기롭게.

오른 팔은 지난 주 피검사 때 후벼판 덕에 시큰거리는데 왼 팔은 오늘 종일 꽂았던 굵은 링겔 바늘 탓에 욱신거린다. 애들 배식용; 3리터 우유를 드는데 손목까지 후들거렸다. 간호통합병동은 코로나라 간병인 출입금지라 하여 오프를 내고 아침에 혼자 운전해서 입원수속 밟고 환자복 갈아입고 사방에 커튼을 두른 침대에 누우니 아- 오랜만에 혼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는 입원 자격을 얻기 위해 아침에 코로나 검사를 했다. 그 탓인지 두통이 심해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아파야 혼자가 되고, 아파야 쉰다. 익숙한 패턴이다. 초과근무 수당 없을 때도 종종 야근이나 주말근무 했고, 자율출퇴근제가 도입된 지금도 자율적으로 초과근무 하고, 오프내고도 회사 시스템 수시로 들여다보는 것을 보면 업무와 관련된 사항은 어쩌..

시간을 꽉 차게.

병원에서 더이상 시도할 수 없는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 퇴원하시니 주말마다 찾아뵐 수 있게 되어 좋으면서도, 순간 울컥 울컥 올라오는 것들을 삼키기 어렵기도 하다. 만지고 귓가에 이야기들을 속삭일 수 있어 감사하지만,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듣기 어렵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지난 주 찾아뵙고 돌아온 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 만나뵈었을 때, 그리고 가장 최근에 어머니와 통화 했을 때, 함께 했던 많은 순간들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사적으로는 시어머니이시지만, 사회적으로는 워킹맘 선배님이기도 하셔서, 내면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고, 조언도 받았었다. 어머니를 못 뵙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나는 어디다 이런 속 이야기들을 하고, 애정과 공감을 ..

머신러닝 채용 연계형 인턴십

한 달의 인턴십 기간 동안 문제 이해, 프로젝트, 발표까지 수준 있는 퀄리티로 만들 수 있도록 가이드하면서, 내 본업까지 구멍나지 않게 챙기려면, 새하얀 백지 같은 친구를 뽑기는 어렵다. 쏟아지는 현업도 하며 (열정과 에티튜드 좋아서 참 고마운) 주니어들 업무 코칭과 크로스체크도 진행하며, 어쩔 수 없이 표준 외 근무를 과하게 진행했는데, 이게 이상하게 일이 겹치며 이슈가 되어, 초과근무는 당분간 안되게 못박혔다. 그래서 야근을 갈아넣어 진행하는 것도 한동안 어렵다. 인턴십 후 정규직 전환까지 시키는 것이 목표인지라, 단기간에 코칭 리소스를 덜 들이면서도, 퀄리티 있는 결과물을 만들 수 있는 친구들을 뽑아야 했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잡아 가르쳐주기에는, 일정이 박혀 있는 본업이 너무 많다. 여긴 아카데미..

사랑이 이런 건가요~

0. 너무 집이랑 학교만 오고 간다며 답답하다는 아이를 위해 늦게 공원을 찾아 떠돌다가 주차장으로 돌아가던 밤길. 어떤 유아가 나를 보며 방긋 웃으며 한참 말을 걸다. 내 손을 잡고 걸어가던 큰 애가 “엄마. 저 애가 엄마를 자기 엄마인 줄 알았나봐. 역시 우리 엄마가 이뻐서 그런가봐.” 라며 다정하게 눈을 맞춰 온다. 1. 드레스룸 불편한 의자에서 연짱 회의를 며칠째 하다보니 여러가지 신경 쓰며 몸에 힘이 들어가 있었는지, 몸살 기운에 어깨가 저릿하며 통증이 심했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 어깨가 너무 아프다 했더니 큰애가 팔을 주물러 주다. 손아귀 힘이 어른 못지 않다. 반대쪽으로 돌아 누우라는데 어깨가 아파 못 하겠다 하니 엎드리라고 하고, 본격적으로 안마를 하기 시작한다. 둘째는 형아 따라서 이리저..

난이도 상승.

최근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상황이 여러 번 있었다. 반복적으로 설명하며 발자취를 더듬다보니 연혁 속 그이는 이삼십대를 꽉 채워 숨가쁘게 살아왔더라. 가진 짐 다 내버리고 생존에 필요한 만큼만 조각배에 싣고 생존해왔더라. 왜그랬나 싶을 정도로 암초 주변을 굽이굽이 돌아왔더라. 노를 놓지 않고 어떻게든 항해를 이어가고 있는데, 더욱 날씨와 풍량은 악화되고, 암초는 더 자주 나타난다. 사십대가 인생에서 가장 빡신 시기라는데, 최근 쏟아지는 일들의 난이도가 높고 간격이 짧고, 많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걸 알아 마음은 굳건하지만 지나가고 또 지나가고. 아직 안 지나갔는데 또 나타난다. 경주마처럼 시야를 좁혀 돌발 상황을 쳐내고 있는데 암울하고 답답한 이야기들이 들려와 기를 빨린다. 조각배는 개조되어 조금 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