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8

한 달 휴가.

2020년 휴가를 하루도 못 썼다. 재택이 무색하게 과로하고 초과근무하고 있던 상황이라, 업무 중에 휴가를 쓸 수가 없었다. 돈으로 돌려주지 않는거라 소진을 해야겠기에 반 년 전부터 내년 2월에 쉬겠다고 이야기하고 업무 페이스를 조율했다. 중요한 업무는 1월까지 마무리하고, 3월에 다시 시작하는 걸로 정리했다. 왜 휴가를 못 썼을까. 일정은 내 입으로 정하는 건데 늘 바쁘게 달리는 건 업무 습관이라 그렇다쳐도. 뭐가 달랐을까. 돌이켜보면, 큰 애가 태어난 11년 전부터 휴가는 애들이 아플 때, 혹은 아이들을 맡긴 기관에서 부를 때를 위해 아껴야 하는 소중한 것이었다. 큰애 어릴 때처럼 애가 일이주 폐렴으로 입원하면 집안이 폭탄맞기 때문에 휴가는 늘 여분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작년은 애들이 안..

엄마, 차라리 때려.

둘째는 여러 번 훈육해도 고쳐지지 않는 나쁜 버릇이 있다. 내 기준에 꽤나 심각한 것인데, 말로도 타이르고 엉덩이도 때려보고 여러 번 했는데. 오늘 저녁에 또 그랬다. 성질이 욱 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때리고 싶지는 않아서, 엄마는 너무 아프다 속상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러지 말자 타이르고, 아이는 미안하다고 울고 한바탕 정리를 하는 중에 다시 또 그러는 걸 보고, 혼자 있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랑 들어가 자라고, 엄마는 이따가 잘거라고. 오늘 네가 말을 안 들어서 같이 자지 않을 거라고 하니, 아이는 통곡하고, 옆에서 눈치보고 있던 큰애가 말한다. “엄마, 차라리 때려. 지금 엄마의 그 말은 쿡 찌르는 것 같아. 내가 애기 때 기억이 있어서 아는데, 애기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엄마랑 늘 같이 있어서..

마음의 감기를 치료하는 귤 꽃.

얼마 전, 사고가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감기가 왔다. 아이들 챙기며 기다려주던 신랑이 해줄 거 없냐고 묻기에, 수면 부족과 두통이 나아질까 싶어 귤을 까달라고 부탁했다. 소파에 누워있는데 들려오는 신랑의 다급한 목소리. 자기야 빨리 먹어. 애들이 자꾸 집어 먹어서 없어진다! 애들도 먹고 나도 먹고 뭐 어때 하면서 식탁에 다가가 보니 자꾸 이가 빠지고 채워지는 귤 꽃이 피어 있었다. 놓은 모양이 예쁘니 한동안 귤 안 먹던 애들이 자꾸 집어먹고 신랑은 모양을 완성해서 주고 싶어서 다시 채워넣고 그 긴박한 순간이, 일상이, 감사하고 소중해서 웃음이 났다.

가을을 멀리서 보면 봄

다시 무기한 재택 근무가 시작됐다. 점심에 시간을 붙여 오프하고 혼자 산책을 다녀왔는데 시력이 나쁜 눈으로 흐릿하게 보니 개나리처럼 보이는 노란색이 가득했다. 가까이서 보면 거뭇하게 시든 잎이지만. 햇볕 아래 멀리서 보니 참 예뻤다. 겨울을 앞둔 가을이지만 햇살 아래 봄처럼 빛나는 날이 있다. 편찮으신 우리 어머니 생각이 났다. 시들시들하게 느껴지는 내 삶도 멀리서 보면 저렇게 예뻐 보일 수도 있겠구나.

나쁜 것만 있지 않다.

리퍼 기기가 도착하는데 3일에서 한 달까지 걸린다더니 수리 맡긴 바로 다음날 입고 되었다 연락이 왔다. 점심 즈음 충동적으로 퇴근하고, 패드 수리 지점이 있는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일주일 전부터 재택을 포기하고, 전일 출근 중이다. 국가가 코로나 대응 단계를 개편한 것이나, 회사가 전직원 출근 지침을 단호하게 전달하는 것이나, 가만 보면, 확진자 백 명 전후에서는 모두 일상으로 복귀하라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재택 가능 항목에 해당되어 재택을 유지할 수도 있었지만, 추울 때 시작해 다시 추운 계절이 돌아온 지금 내 안의 피로도도 상당히 많이 쌓여, 상사에, 동료들에, 재택하겠다 부탁하고 양해 구하고, 집에서도 일 열심히 한다 증명하기 위해 동동거리는 것들이 모두 지겨워서, 하고 싶..

욕심을 제어하는 법.

기대와 다른 결과를 보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가 많다. 기대한 내가 잘못 이려니 해도, 반복되는 생각에 잠식되며 마음은 제어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있다. 바라는 것 갖고 싶은 것 이루고 싶은 것 수십가지 적어놓고 우선 순위에 동그라미를 친다. 정말 중요한 것들에 이상이 없다면, 보너스는 드렁칡인거다. 분노하고 서운할 때 있지만, 조심 조심 되세긴다 생채기 여러 군데 긁혔지만, 품고 있는 건 지켰노라. 너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중심이 뭔지 잊지 않고 한 발자국씩 걷다보면, 결국 다 지나간다. 몰아치던 혹독한 것들도 지나고 나면 내 삶에 한줌도 안 되는 것들이더라.

냉장고

근무시간이 많이 오버되는 것 같아 오전에 두 시간 오프하고 산책을 다녀왔다. 샤워 후 식사를 하고 냉장고를 열었는데 문득 그 내용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우유, 커피, 주스, 탄산수, 샌드위치 용 스프레드 여러 개, 흑당시럽, 생크림 스프레이, 초코크림 스프레이, 생선 용 고추냉이, 육류 용 고추냉이, 각종 소스들. 식사에 필수가 아닌 식자재가 다양하게도 들어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네 집 식탁 위에 늘 있던 캘리포니아 산 호두가 부의 상징 처럼 느껴지고 참 부럽고, 탐이 나고 그랬었는데, 우리 애들은 먹을 걸로 친구 집을 부러워하지는 않겠구나 싶으니까 제법 성공한 삶 같은거다. 가진 걸 하찮게 여기고 나를 작게 느끼고 스스로를 부족하다 여기고 못 하고 있는 것만 심각하게 느끼는 증상이 냉장고 덕분에, ..

재택근무 7개월 째.

중간에 회사 정책이 전면 출근으로 바뀌면서, 혼자만 재택을 유지하기 어려워, 출근일을 늘리며 고민하고 있던 찰나, 다시 사회적 거리두기 2.5 단계가 되며 전사 원격 근무로 전환되었다. 그래서, 7개월째 재택근무 중이다. 아이들 방에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두고, 오전에 온라인 수업할 때는 큰 애를 옆에 두고 있으나, 가능하면 얼른 애를 놀라고 내쫓고 혼자 일하곤 한다. 아침에 부모님께서 일찍 와주셔서 아이들 끼니 챙겨주시는 덕에, 낮에는 그냥 방콕 열일 모드로 지낸다. 아이 병원 진료로 휴가를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다. 점심 시간에 애 데리고 동네 소아과 다녀와도 30분이면 충분하다. 작은 애는 어쩌다 농가진이 생겼는데, 항생제 먹여 다 치료해놓으면 재발하고 또 재발해서 벌써 세 번째를 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