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변명은 아니지만.

LEEHK 2008. 1. 6. 03:43

 최근 3주 정도 신경이 곤두서고 쉬어도 쉰 것 같지 않고 정신적으로 꽤나 힘들었다.

 'wtrack 몇 번 코드에 몇 번 매크로 순서를 이렇게 바꾸는 게 낫겠다.' 라던가, '거기서 데이터를 이렇게 가공하는 부분을 추가해야겠다' 라던가, '아 이것도 해야하는데 이건 이렇게 이렇게 한 번 생각해보아야 겠다.' 라던가가 정말 시도때도 없이 생각나곤 했다. 당장 적어두지 않으면 바로 잊어버릴 게 분명한데, 자려고 누운 순간이나, 버스에서 서서 가는 도중 등 멍하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에는 항상 그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일어나 불을 켜고 가방을 열어 수첩을 꺼내서 적기엔 온 몸이 너무 피곤했고, 서서 가는 버스는 지나치게 흔들리고 사람도 많았다. 당장 적어두지 못하기 때문에 잊지 않으려고 곤두세우다보니 스트레스 받았고, 깜빡 잠이 들어도 꿈에서 내내 일하는 꿈을 꿨다. 원래 내 꿈은 비현실적인 '로맨틱버라이어티판타스틱액션'이었는데, 회사에서 일하는 현실적인 꿈만 꾸게 되었다. 그러다 일어나도 전혀 개운하지 않고, 내가 하려던 일들 중 단 한 개라도 생각나지 않으면 그것도 나름대로 짜증이 났다. 업무시간 중에도, 할 거리가 네다섯 종류 몰려있는데, 시간 관계상 우선순위를 결정해서 하다보면 한 달 넘게 밀리고 있는 작업도 있고, 거기다 새로 급박하게 들이닥치는 애들도 있어서 항상 곤두세우며 일하고, 할 일이 계속 쌓여 있는데 그것을 얼른 다 해치울 수 없는 상황이 짜증났다.

 사실 쉬는 시간에는 일 생각 안 하고 푹 쉬어야, 다음 날 뇌가 깔끔하게 재부팅이 가능하다. 그런데 꿈에서도 일하고 있고,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도 일 생각하고, 회사에서도 일하고, 저녁 먹고 야근하고, 퇴근하는 버스에서도 오늘 못 한 업무 생각하고, 자기 전에 구상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꿈에서도 일하고, 다음날 출근해서 또 일하고 야근하고... 생활이 일주일이 넘어가니까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거기다 3주가 넘어가니까 뭐 이제 체력도 없는데다 업무시간에도 계속 초조하고 불안하고 효율이 떨어지니, 의욕도 사라지더라. 술자리 도중에도 자꾸 오늘 못 하고 온 일이나, 다음주에 출근해서 할 일들이 생각났다. 할 일이 계속 쌓이는 즐거움을 넘어선 초조함과 불안함이 상당히 있었다. 문득 혼잣말로, "아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되네." 라고 중얼거려서 즐거운 대화의 맥이 끊기기도 했다.

 연말이라 약속이 연속적으로 잡히게 되다 보니, 야근 안 하는 저녁이나 휴일에도 항상 번화가에서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각각 그룹은 모두 함께하면 즐겁고 행복한 사람들인데, 나 혼자 멍하니 아무생각 안 하고 쉬는 시간을 한동안 갖지 못하게 되니 그것도 꽤나 스트레스가 쌓인 모양이다. 일 아니면 연말모임이라, 한동안은 집에서 동영상도 못 봤다.

 

 눈이 즐거운 남자애들이나, 여자애들이 잔뜩 나오는 방송이나, 너무나도 자극적이라 다른 차원의 얘기같아 오히려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일본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같은 것을 하루종일 보다보면 확실히 뇌가 휴식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보는 것들은 하루만 지나도 내가 뭘 봤었나 전혀 기억도 안 난다.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내용을 몇 시간이고 연속적으로 집중해서 보기 때문에 그렇게 한참 보기 전에 있었던 내 일상 생활에 대한 상념들을 잠시 멈출 수 있는 것 같다.

 TV는 바보상자가 맞다. 보면 한없이 멍청해진다. 내가 TV를 보지 않는 것은 내 취향에 맞지 않는 내용이 나올 때마다 채널을 바꿔 다시 내 취향 방송을 찾는 것이 귀찮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터넷에서 내 취향 방송들을 잔뜩 다운받아 놓고 골라보는 것이 백배는 좋다. 드라마는 호흡이 너무 길고, 시청자를 괴롭게 만드는 위기나 클라이막스 등이 있어서 싫다. 드라마는 시청자를 스토리 전개에 따라 웃고 울리려고 하는 의도가 명백하다. 그게 싫다. 집에서 쉬면서 동영상을 볼 때는 그저 즐겁고 싶다. 무섭거나 슬프거나 불안한 기분 따위 느끼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같은 건 다운받지 않는 편이다.

 오늘 하루종일 집에서 쉬면서, 食わず嫌い, さんま&SMAP 및 기타 방송들을 꽤 오래 봤다. 물론 각자 이쁘거나 잘생긴 사람들이 잔뜩 나와서, 문득 덕후인가-_-생각이 들 정도로 취향이 분명한 동영상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확실히 필요하구나. 오늘 하루종일 일 생각 한 번도 안 했다. 3주 만이다.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고 마음이 편하다. 맘편하게 먹고, 쉬고, 신문보고, 책 읽고, 영상 보면서 감탄했다.

 만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동방신기나 쟈니즈 계열, 일본 오와라이계나 버라이어티 쪽 방송을 즐겨 보는 것은 나에게 꼭 필요한 일이라고 오늘 느꼈다. 일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충실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동굴에 들어가 휴식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동굴에서 멍하니 혼자 아무것도 하지않는 것은 지루하고 오히려 스트레스다. 동굴에서는 사람이 아닌 것들과 놀 필요가 있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낚시일수도 있고, 오락일 수도 있고, 건프라일수도 있고, 운전일 수도 있다. 나는 나에게 맞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잘 찾고 있다. 거기다 덕분에 일본어도 이만큼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는걸? 변명은 아니지만, 이러한 '어른이 되서까지 보기엔 너무 유치한 것 같은' 영상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만화를 보는 것은, 오히려 현실에 더더욱 충실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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