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동생이 오늘 상기된 목소리로 "누나! 나 초콜렛 받았다." 라며 예쁜 상자 하나를 보여주었다.
단골손님인 20살 정도의 아가씨가 오늘 계산하고 나가는 길에 "이거 드세요." 라면서 수줍게 건네주고 나갔다는 것이다.
보라색 선물 상자에, 온갖 종류의 초콜렛들이 한가득 들어있는 걸 보니 동생이 기특하기도 하고, 참 뿌듯했다.
한편 이대로 그녀와 연락이 끊기면 어쩌나 하고 내가 더 초조해져서는,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다는 동생을 괜시리 타박했다.
화이트 데이니, 발렌타인 데이의 존재를 슈퍼가 아닌 곳에서 느껴본 것은 정말 오랫만이다.
대부분 편의점이나 마트 특판 매대 전단지 등에서야 간신히 눈치를 채곤 한다.
과자 회사들만 떼돈 벌고, 정체불명의 사탕, 몇 년 묵은 초콜릿이 난무하는 가식적인 행사가 이렇게 순수하게 설레일 수도 있구나.
돌이켜보면, 사실 발렌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에 딱히 설레였던 기억이 없다. 그저 신나고 재미있는 날일 뿐이었다.
스무 명 정도에게 사탕 선물 세트를 받았던 학부 시절 화이트 데이에도 두근거림을 느끼지는 못했었다.
선물 줄만한 여성이 몇 명 없는 공대였기 때문에 그런 선물에 크게 의미를 두기가 어려웠고, 학부 졸업반이 되기 전까지는
남녀관계에도 굉장히 둔했었다. 남녀간의 애정보다는 친구로서의 우정이 더욱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사탕과 초콜렛을 주는 날은 고백하는 날이라기 보다는 아는 이성에게 의리로 선물을 돌리는 날이라는 관념이 강했다.
남들이 다 하기 때문에, 나도 하는 것은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설레이진 않다. 즐거운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부부간이나 연인간의 행사가, 새롭게 인연을 만들고자 하는 고백보다 더욱 깊이있고 즐거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설레임은 이성에 대해 잘 모르는 어릴 때 제일 강하게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가방에 전화번호를 적어 넣은 답례 초콜렛을 가지고 다니다가, 그 아가씨가 다시 오면 꼭 전해 주라는 조언을 해 주고 나니.
내가 동생보다 더 신나서 날아다니고 있었다. 쑥스러워하는 그 표정의 설레임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사실 삶은 그 어떤 TV 쇼보다 더 드라마틱 하다. 이후의 이야기가 그 어떤 소설의 전개보다 더 기다려진다.
물론 그 아가씨는, 자기가 고백한 남자의 누나가, 이렇게 신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진 않겠지만. =_=
'나 > 상념의 문서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잘못 배달된 택배. (0) | 2008.02.14 |
---|---|
일본어와 영어 공부 목표 (0) | 2008.02.10 |
대인관계를 맺을 때 가장 위험한 시기. (0) | 2008.01.15 |
변명은 아니지만. (0) | 2008.01.06 |
반 년 간 준비했던 서비스의 오픈. (0) | 2007.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