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밤 안개.

LEEHK 2007. 12. 21. 01:40

 술에 살짝 취한 밤, 안개가 자욱한 가로등 밑을 바라보면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갈아타는 버스의 막차가 11시 반이었는지, 12시 반이었는지 햇갈리는 시간, 무작정 30분을 입김을 내뿜으며 서 있었다. 287+인터넷 키를 성남에서도 써볼 수 있다고 기뻐하며 버스 정류장 번호를 확인하다 문득 실망한다. 수명이 다해가는 베터리 때문에 휴대폰은 작동을 멈췄다. 30분이면 걸어 올라갈 수 있는 거리, 3천 원이면 택시타고 현관 앞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는데 왜인지 움직이기가 싫다.

 아직까지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없다. 납득하게 되면 용서할 수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에서 결국 탓할 수 있는 대상은 나 자신 뿐이다. 그래서 조금 피곤하다. 딱히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닌데  정신차리고 보면 네다섯곡이 휙휙 지나있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버스가 아니다. 체온이 많이 내려가 추워진다. 빈차 불이 들어온 택시를 열 대도 넘게 보내고 하나를 잡아탄다. 머리를 바짝 자른 택시 기사 분은 목 뒤가 두 겹으로 접힌다. 타인을 무조건 믿어서도 안 되지만 굳이 경계할 필요는 없다. 험하게 생겼다고 해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다정하다고 해서 믿어서도 안 된다.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사생활은 사생활이다. 엄밀하게 구분해야 한다.

 더 늦은 시간에도 아무렇지 않게 걸어 올라갔던 그 길에 밤 안개가 자욱한 모습은 너무나 고요해 보였다. 오늘은 걸어 올라가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기도 하고, 싸늘해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마음이 평온한 것이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본부, 다른 경력, 다른 직군의 사람들과 함께해서 그런지 취하지도 안 취하지도 않은 그 아슬한 경계에 걸쳐 설 수 있었다. 집에 오는 길에 이런 느낌을 받아본 건 굉장히 오랫만이라, 데자뷰인가 하는 의혹도 들지 않았다. 어느 일이든, 어느 자리든 조금씩 화두를 던져준다.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은 나머지 때때로 피로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같은 밤은 육지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마치 고요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그 나름대로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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