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스플리트 숙소.

LEEHK 2014. 5. 27. 02:45

 

 

 

 

 

 

 

 

 

 

 

 

 

 

 

 

 

 

 

처음 여행을 나올 때의 모토는, 집과 회사 양 쪽 과의 격리였다. 항상 속해 있는 곳에 가열차게 파고들어가 심력과 시간을 쏟아내는 병에 걸려 있는지라, 이 것을 한 번쯤 끊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과한 것이 문제인지, 할 일이 많은 것이 문제인지, 닭과 달걀처럼 돌고 도는 이 고리를 잠깐 멈추고, 삶의 방향성에 대하여 과연 본질적인 자신은 어떠한 입장인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치열한 속도감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해봐야 하는 시점인지, 평생 이리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팔자려니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을런지 햇갈렸다.

 

 

두브르브니크에서 불면의 밤을 보내며 작은 아이의 몸뚱아리가 내 무릎을 꼭 안으며 "엄마 보고싶었어~" 하며 매달리는 상상을 하니 미칠 것 처럼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가 어리석다 땅을 쳤다. 이화경은 이미 람이 엄마로서의 인생을 살고 있으며 그 둘은 더이상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전에 알고 있다 생각했던 것을, 사실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걸 강하게 깨달았다. 그 아이에게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고, 잠시 떨어져 있을 생각을 한 것은 한없이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때부터 돌아갈 방법을 계속 고민하게 되었다. 삼사일 안에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나은가, 이미 정해진 여정의 반이 접힌 상태에서 몸과 마음을 다듬어 천천히 일주일에 걸쳐 돌아가는가. 겨우 보름 여행도 이러한데, 한 달 여행 계획을 세웠던 무모함이 떠올라 정말 나는 나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출산 육아 전 이화경은 절반 정도 남아 있고, 나머지 절반은 아이가 만들어준 엄마라는 사람이었다. 생의 나침반을 다시 잡아야겠다. 예전의 기준점과 선이 도통 맞지 않아 혼란스러운 기분이 종종 들었다.

 

 

그 난리를 친 날, 놀랍게도 회사에 관련된 큰 소문을 듣게 되었다. 비슷한 이야기는 전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이번에는 앞 뒤가 머리 속에서 순식간에 맞춰지며, 심상치 않은 기분에 수시로 상황을 주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플리트 숙소 둘째 날 새벽, 시차 일곱시간 빠른 한국에서 정식 발표가 났고, 육아 휴직 간 팀 동료와 해외 나와있는 나까지 팀 마플이 시끌벅적했다. 나름 오래 다닌 회사고 굉장히 애정이 있기에 관련 글들을 챙겨보며, 소회를 메신저로 지인들과 나누며, 불처럼 생각이 꽃피어올랐다. 상반기 정신없음이 살짝 가라앉나 하는 찰나, 하반기 내내 또 돌풍이 불 것이란 예보를 받아서 마음이 복잡하기는 하지만, 신선한 바람이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에 기대도 된다. 사실 출국하기 전 날까지 위키 문서를 정리하며 다듬었고, 출국 당일 업무 통화를 했으며, 여행 내내 종종 일은 어찌 되었지, 그 업무는 돌아가면 이 방향으로 다시 접근해봐야겠다 라는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일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병이 또 돋을까봐 회사 메일 계정은 자동 연결 해제해놓았지만, 사실 세네번 이상 들어가며 목록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큰 소식이 확정된 뒤로 앞으로의 방향성과 관련된 생각이 자주 떠오른다. 다 부질 없다. 난 지금 크로아티아 바닷가 마을 창가에 앉아있고, 안식 휴가와 연휴가 끝나 다시 출근하려면 아직도 2주나 남았는데, 참 웃기기도 하다. 단순히 월급 때문에 일하고 있지 않다. 나는 일과 회사가 좋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돈도 벌고 있다. 감사한 일이다. 이에 의미있는 일까지 더하려 앞으로도 도전을 해 나가야 겠지. 그 와중에 버닝하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든다.

 

 

 

 

현재는 일주일을 잘 버티고, 정해진 일정을 다 소화하고 돌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 숙소가 매우 좋은 곳이다. 조용한 주택가 옥탑방인데, 시원한 바람과 전망이 아주 좋다. 스플리트 도착한 첫 날 짐을 풀고 장을 보러 내려갔다온 뒤로, 둘째 날인 지금까지 계속 집 안에 앉아있다, 누워있다 하고 있다. 마트에서 온갖 종류 피클을 쓸어왔으며, 안 짜고(!) 담백한 밥 같은 빵을 빵칼로 썰어가며 요거트나 버터를 발라 먹었다. 모든 현지 주방 도구가 갖춰진 부엌이 펭귄의 요리 욕구를 불러일으켜- 감사하게도 파스타를 얻어먹고- 설겆이로 보답하고 있다. 여기 시간 오후 세 시, 한국 시간 밤 열시 즈음, 일주일 만에 처음으로 가족과 화상통화를 하여 아이 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신나하며, "엄마 왜 안와? 조심히 와~ 빨리 와~ 이모 있어? 이모한테 장난감 보여줄래~ 엄마 이거 봐 내가 만들었어~ 엄마 빨리 와~ 엄마 천천히 와~ 엄마 아빠 아들~ 엄마 아빠 새끼~ 근데 람이 한 번만 놀게 엄마 끊어." 하며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대가족 속에서 자란 아이에게 엄마의 비중은 다행히 절반 이하라,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건강하고 발랄하게 지내고 있었다. 얼굴 보면 너무 보고싶을까봐 동영상만 주구장창 보고 있었는데, 기우였다. 신랑이 "실컷 쉬고 놀다 와. 돌아오면 끝이야. 여긴 전쟁터야. 그럼 나 이제 애기 씻기고 어린이집 짐 챙기고 재울게 안녕." 이라고 한 것처럼, 돌아가면 생활의 무게감에 크로아티아를 여행하던 이 시기를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어 여행을 계속할 힘을 받았다. 엄마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죄책감이고, 여행을 그만두고 싶었던 이유는 절절한 그리움이었다. 이것들을 어느 정도는 해소하고 어느 정도는 껴안고 남은 여정을 계속 해야겠지. 이 나라에 일주일이나 더 있어야 한다. 집에 가고 싶어요. 출근도 하고 싶어요. -_-;;

 

 

 

과일 몇 조각, 주전부리 종종 하며 창 밖 항구와 바다 건너편 멀리 보이는 거대한 마을을 바라본다. 척박한 비오코보 산과 새파란 바다 사이 마을이 들어설 수 있도록 허락된 땅은 드물다. 인류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을을 일구고 건물을 세우고 서로를 지키며 교류해왔다. 바다 건너 로마에서 때로는 억압받고 때로는 독립하며 지켜낸 작은 도시. 오늘은 종일 숙소에서 멍때렸으니, 내일은 돌아다녀 보아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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