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두브로브니크 마지막 날.

LEEHK 2014. 5. 25. 07:11

 

 

 

 

 

 

 

간밤의 위기 때문에 아침에 펭귄과 긴장감이 조금 있었다. 단 둘이 하는 여행에서 한 명이 향수병에 걸리는 것은 다른 한 명에게 영향이 있는 문제다. 알고 지낸 지 십오년 가량이 되었지만, (내 친구들이 다 그렇듯) 드문 드문 만나며 지내는지라, 이렇게 단둘이 밀착해서 지내본 적 없는 사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 생각보다 펭귄은 섬세한 아이였고, 펭귄이 알던 것보다 나는 감정 기복이 심하다 했다. 외식을 중단하고 집에서 펭귄이 해주는 음식을 먹으며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확실히 보기드물게, 코드가 잘 맞는 여행 파트너라는 생각이 들어 하루가 끝나갈 무렵 마음은 다시 좋아졌다.

 

 

어젯밤에 왜 그렇게 정신이 반쯤 나가있었는지, 하루종일 도시를 돌아다니며 이유가 하나씩 떠올랐다. 일단 온 몸에 지나친 소금이 돌고 있었다. 그나마 노솔트를 반영해 준 코노바에서 기분 좋아 와인을 여러 잔 마신 상태에서 뜨거운 성벽투어에 케이블카 투어- 너무 더워 아이스커피를 두 잔 연속 마셨더니, 숙취에 열사병에 카페인 과다 섭취로 인한 두통이 생겼다. 나는 두통에 무척 약하다. 올드시티 진입구 옆의 숙소는 주말의 관광객들로 새벽 내내 시끄러웠고, 공기는 후덥지근하고, 일층이라 모든 창문을 걸어닫았더니 갑갑하고 숨 쉬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생겼을 간접 트라우마가 유사 폐쇄공포증으로 발현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귀환일을 앞당기려면 손해보는 금액이 상당히 있었다. 조금 버텨보자는 기분에서, 어차피 공중에 날릴 돈, 나한테 써보자. 하는 마음에 소비를 하며 기분을 풀었다. 일단 마사지를 받았다. 크로아티아계 캐나다인 여성이 하는 마사지 샵이었는데, 긴 여정에 피로했던 근육을 풀어주며 기분 전환을 했다. 다음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플리트비체를 단연코 천국이라 표현하며 강추하며 들려준 이야기에, 그 곳에 가보고 싶어졌다. 1990년대 유고내전 당시 플리트비체 역시 공격을 받아 숲이 다 망가졌었단다. 그녀는 그 때 학생 신분으로 공원 재건을 위해 자원봉사를 왔었는데, 길 하나를 다시 다듬기 위해 무너진 나무만 기간 내내 치웠다고 한다. 그렇게 천여명이 봉사를 왔었고, 덕분에 그 숲이 정리되어 지금처럼 아름다움을 다시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찡~ 하여, 가보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이대로는 외식을 할 수 없다는 기분에 미친듯이 한식당과 한국 마트를 검색했는데, 크로아티아에는 한식당이 없기에 창업 유망하다는 글만 나왔다. 고추가루라도 구해보려고 버스를 타고 대형 마트에 나왔다. 그리고 발견한 유럽산 일본식 야끼소바 컵라면, 칠리가루, 파프리카 가루, 생야채, 심심해서 감사한 블루베리, 오이피클 고추피클로 두 끼를 모두 집에서 먹었다. 다행히 펭귄은 요리를 좋아하고 설겆이를 정말 싫어하는데 비해, 나는 설겆이를 좋아한다. 그래서 모두 펭귄이 요리해 주었고 나는 탄성을 지르며 먹었다. 인체에 먹거리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샐러리를 생으로 씹으며 느꼈다. 안 짜!!!! 안 짜다고!!!!! 부엌이 아름다운 스플리트 숙소에서는 펭귄이 해물짬뽕과 오이 김치를 해주겠다 했다.

 

 

 

와인샵에서 한국에 가져갈, 두브로브니크에서 밖에 못 사는 와인을 고르다, 올드시티 가격의 반값이던 대형마트 와인코너 생각이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트로 갔다. 한 번 가봤던 곳이라 조금 익숙해졌다고 딴짓하다 내릴 곳을 놓쳤다. 몇 정거장 더 가서 걸어 돌아가려고 바닷길을 따라 걷는데 와이너리 라고 써있는 가게가 보였다. 여기 와이너리냐 물어봤더니 시음할래? 해서 좋아라 했더니 한 잔 제대로 따라주어 향도 맡아보고 빛에 비춰도 보고 마셔도 보았다. 어디서 왔냐 물어 한국이라 했더니 남한이지? 해서 그렇다 했다. 북한은 여행 못 가지~ 하길래 한국에 대해 잘 아는구나? 했더니 크로아티아도 한국과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대답이 나와 갑자기 마음이 찡했다. 한 병 사고 사진 찍어도 되냐 물으니 와이너리도 들어가보게 해 주었다. 실제 와이너리 구경은 처음이었다. 연간 삼백병 밖에 생산 안 한다는 소형 와이너리를 단순히 버스 잘못 내려 들어가게 된 해질 무렵의 작은 우연이 굉장히 기분 좋았다. 이 맛에 여행하지- 라는 생각이 들어, 노골적인 관광지인 올드시티에 사 일이나 묵는 것이 굉장히 피로했었구나 느꼈다. 숙소는 현지인들 생활권에 잡고, 현지인들의 거리를 걸으며, 음식은 대충 마트에서 사서 떼우는 게 내 여행 스타일이었다는 기억이 났다. 몇 년 만에 여행 나오니, 여행 리듬 잡는 것도 웜업이 필요했던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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