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내조 일일 체험 : 신랑 회사 집들이.

LEEHK 2009. 6. 23. 02:33

 

 

  결혼 후 반 년 동안, 신랑은 회사에서 '집들이 하라' 는 공격에 시달려왔다. 지지난 주에는 신랑을 아끼는 그룹장님의 '차마시자' 일대일 어택까지 있었다. 귀찮고 번거롭긴 하지만, 다른 신혼 직원들도 대부분 했다는데 왜 내 신랑만 그 것 때문에 계속 시달려야 하는가 싶어서 다음주 금요일로 흔쾌히 날을 잡았다. 물론 조건은 있었다. 둘 다 휴가를 쓸 것, 그리고 음식은 사서 할 것. 둘 다 내가 제시한 건 아니었다. 예상인원이 한 두 명도 아닌 20명인 데다가, 우리 즐겁자고 하는건데 힘들지 않고 체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준비하자는 게 신랑의 의지였다. 비용 절감 차원에서 월차쓰라는 압박이 상부에서부터 내려온 덕에 집들이 당일 신랑은 월차를 쓸 수 있었고, 나도 휴가를 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계획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문제는 음식이었다. 시어머님과 통화를 하다가 신랑 집들이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어머님은 마침 '간자미무침' 을 해 두신 게 있으시다고 가져다 주신다는 감사한 말씀을 하셨다. 냉큼 "어머님 저희 둘 다 금요일에 쉬어요~ 금요일은 언제든지 오셔도 되요~" 라고 말씀드리고 나니, 아치 싶은거다. 아들 회사 상사/동료/후배를 집에 초대해놓고, 부부가 둘다 휴가를 쓰면서 음식은 모두 사서 대접한다면 세상 그 어떤 시어머님이 좋아하실까? 물론 우리 시어머님은 항상 다정하시고 우리를 잘 이해해주시는 멋진 분이기 때문에 실제 그런 생각을 안 하셨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며느리 최고" 라는 칭찬을 받고 싶은 '착한 며느리 컴플렉스' 가 나에게도 있는지 그 전화 이후 하루종일 고민했다. 음식을 정말 사서 해도 되나, 휴가까지 쓰는데 음식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 다음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20인분 음식을 준비할 자신이 없어서 사서 하려고 했는데, 그러는 건 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고민이에요 어머님. 음식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사서 할까요? 만약 직접 요리하게 되면 금요일날 어머님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오후에 오셔서 음식 간 좀 봐주세요." 내가 생각한 예상 답변은 YES or NO 였다. 내가 제시한 보기 중에서 답이 올 줄 알았다. 무리가 되니까 음식을 사서 접대하던가, 그냥 음식을 해라 내가 간을 봐줄게 둘 중 하나일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 어머님 훨씬 더 적극적인 답변을 주셨다. "전날 밤에 돼지갈비 재웠다가 익히고, 밑반찬거리 몇 개 만들어서 들고가마. 너는 그냥 냄비에 데우기만 하면 될거야. 다른 거 또 뭐 해줄거 있니? 언니(손윗시누이)랑 아침 일찍 가서 음식 같이 해주마." 신랑과 나는 살짝 패닉이었다. 어머님께서 힘드실까봐 걱정도 되고, 죄송스럽기도 했다. 반면에 살짝 안심이 되기도 했다.

 

 일주일 전부터 대청소를 하고, 정리를 하고, 그릇과 상을 빌려오고, 장을 봐오고 하느라 내내 수면부족 상태인데다가, 집들이 전 날에는 새벽 3시에 잠들었다. 아침 10시경 언니랑 어머님이 오셔서 같이 음식을 하고 돕고 하다가 살짝 숨을 돌리던 낮 3시, 신랑과 나는 잠시 쓰러져 잠들었고, 어머님과 언니는 밖에서 전을 부치셨다. T_T '슈퍼우먼 며느리' 가 되고자 했던 나의 꿈은 그저 꿈일 뿐, 나는 그저 '막냉이 며느리'일 뿐이었다. 비닐장갑도 끼지 않고 청량고추를 다진 손으로 눈가를 비비다가 눈물을 줄줄 흘리는 개그까지 했다. 오후 4시 자다 일어나 꽃단장을 한답시고 렌즈끼고 (청량고추의 흔적이 아직 남아 눈매워서 줄줄 울고) 화장하고 옷입고 하는 동안 어머님은 도토리묵 무침, 나물무침, 연포탕에 넣을 낙지 다듬는 것 까지 다 해주셨다. 딸내미도 아니고 며느리인 주제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T_T  손님들이 도착하기 1시간 쯤 전, 어머님과 언니는 6인분 밥솥이 걱정되셨는지, 손님들 밥 부족하면 주라고 떡까지 사주시고 떠나셨다. 더할나위없는 고마움과 사랑을 담아 "충!성!" 경례하며 배웅했다.

 

 

 상에 음식도 가득 차려졌겠다. 청소도 다 했겠다. 화장도 하고 옷도 갈아입었겠다. 그 때부터 조신한 와이프 노릇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게 다 신랑이 회사사람들에게 '으쓱' 한 번 해 보라고 하는 일인데, 제대로 해줘야지 어머님과 언니의 수고가 꽃을 피우는 길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해질무렵 도착한 손님의 70%는 차/부장 급으로, 가장 나이 많으신 분은 울아부지랑 동갑이셨다. 젋은 사람은 딱 셋으로, 신랑의 입사동기/제주출신 2년 후배/1년차 신입사원 뿐이었다. 신랑의 팀장님은 예상보다 젠틀했고, 손님들 모두 재미있는 분들이었다. "음식 누가 했어. 신랑이 다 한 거 아냐?" 라는 농담을 들었을 때는 뜨끔했다. 저 사람들 내가 그런 캐릭터인지 어떻게 알았지? -_-; 분위기는 상당히 화기애애했고, 음식 맛있다고 칭찬도 자자했다. 거짓말을 못하는 이화경은 "시어머님께서 도와주셨어요." 라고 자랑했고, "보통 친정어머니가 도와주시는데, 시어머니한테 정말 사랑받나 보네." 라는 감탄을 들었다.

 

 집들이 행사 준비하느라 목요일부터 들떠 있었다던 그 팀 분위기를 듣고 노래를 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준비는 훨씬 더 철저했다. 말씀 참 잘하시는 차장님은 프린트한 행사 진행 대본과 땅땅 굳은 북어를 가지고 나오셨고, 부름을 받고 복명복창하며 뛰어나온 젊은 사람 둘은 신랑은 거꾸로 맸다. 딱딱한 북어는 신랑은 발바닥을 때리는 도구였다. 덜 맞게 하기 위해 신부는 짖궂은 질문에 대답하고 노래를 부르고 살짝 춤도 췄다. 사람들은 점점 술에 취해가고 분위기는 무르익어 신랑의 발바닥을 내리치는 강도가 점점 세어져 걱정이 되던 시점, 초인종 울렸고 경찰이 들어왔다. "좋은 일 있으신가본데, 조금만 더 조용히 해주세요, 신고가 들어와서요^^;;"  경찰이 신랑 발바닥을 구했다.

 경찰의 등장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전환되어 포커파는 작은방으로, Wii파는 마루로 집결했다. 나는 설겆이를 했다. 신랑과 1년차 신입사원이 도와준다고 접근했지만 손을 휘저어 내쳤다. 신랑은 집주인으로 사람들 대접해야 하고, 혁씨는 손님이니 가서 노세요 하고 보냈다. 설겆이 하는 틈틈이 집안을 살피며 이곳저곳 빈 안주와 과일을 보충하고,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Wii에도 두어번 참가했다. 나이 지긋하시고 성격이 불같다는 분들이 Wii 리모컨을 쥐고 열중해서 휘두르는 모습은 참으로 웃기고 귀여웠다. 포커하는 방은 열기가 너무 뜨거워서 상큼하게 입가심 하시라고, 얼음 띄운 매실차와 토마토생과일쥬스를 들여보냈다. 포커하는 분들이 뭘 자꾸 주시냐고 그만 주시라고 하시길래 미안해하지 마시라고 "비타민 드시고 힘내서 하시구요~ 1등해서 많이 따시면 저도 좀 주세요~" 하고 나왔다. 근데 정말 받았다. =_= 중간에 1만원, 끝나고 3만원. 물론 사양하진 않았다.

 

 Wii를 하던 분들이 땀으로 샤워를 하던 무렵, 그 팀 팀장님의 진두지휘로 모두 훌훌 떠나버린 뒤, 계속 서서 돌아다니던 온 몸은 녹초가 되었다. 졸리고 피곤한 몸으로 남은 설겆이를 하다가 그릇 3개를 깨먹었다. 방을 치우는 도중, 발바닥 때리기 할 때 진행하시던 차장님이 들고 읽으시던 대본이 발견되었다. 중간과 끝에 두 번 반복되던 문장이 눈에 띄었다. '신부 반응이 좋지 않을 시 행사는 중지.'  신랑이 발바닥을 그렇게 많이 맞았던 건 신부 반응이 좋았기 때문인가;;;;;;; 신혼인 직원들의 집들이를 여러번 하긴 했지만, 발바닥 맞는 행사라던가, Wii 라던가 이렇게 떠들썩하고 재미있게 놀았던 집들이는 처음이라며 신랑은 매우 뿌듯해 했고, 당일 우리도 참으로 즐거웠다.

 

 

 

 행사를 잘 치렀지만, 묘한 이질감이 며칠동안 계속 머리 속을 떠돌았다. 행사를 치뤄내면서 내 이름 소개를 하지 않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김모모 차장입니다." 라는 인사에 그냥 웃으면서 "안녕하세요~" 라고 대답했을 뿐이지 "이화경입니다." 라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버릇처럼 내 이름을 소개하려다, 어차피 이 사람들 그 이름 기억도 못 할 거고, 이 사람들에게 나는 '이화경' 이 아니라 그저 '제수씨', '형수님' 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조란 이런 것인가? 나는 '한 사람의 부인'이지 내 개인으로 존재하는 객체가 아니었다. 신랑이 '으쓱' 했다고 하니 나도 참으로 뿌듯한 행사였다. 하지만 이런 일을 매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조를 잘 해서 신랑을 입산양명하게 만들었던 그네들의 조강지처는 항상 이렇게 살았겠구나,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도 조금 들었다. 내가 아닌 신랑에게 인생의 목표를 걸고 그를 보조하는데 전력투구하다보면, 그 자체가 신랑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까? 잘 안 될 경우 '내가 이렇게까지 나를 희생했는데..' 하며 신랑을 얼마나 원망하게 될까. 왠지 내조의 단점만 자꾸 생각이 났다.

 한두번, 가끔 있는 '내조 일일 체험' 은 최선을 다해 해 줄 수 있다. 나는 연기도 잘하고, 든든한 내 편도 많다. 하지만 나는 내 삶의 목표를 나 자신에게 두고 싶다. 신랑이 나를 의지하고 기댐으로써 더욱 힘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지, 신랑의 미래에 내 미래를 투자하며 살고 싶지는 않다. 이번 일로 다시금 느꼈다. 나는 평생 일해야 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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