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한 번은 꼭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자주 만나면 몇 달에 한 번씩 보기도 하지만, 뜸할 때는 일 년에 한 번 간신히 만난다. 만나고 나면 항상 '나를 알아주는 친구' 를 만났다는 감동에 며칠간 마음이 따~뜻~하다. 나조차 잊고 있던 부분에서 나를 배려해주고 이해하는 것이 노력이 아니라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는 건 참으로 행복하다.
일화1.
이틀 전 혜원이네 집에서 송년회를 했다. 느즈막히 8시쯤 도착하자 피자, 샐러드, 닭꼬치, 캘리포니아롤, 골뱅이무침 등의 조리가 한창이었다. "나 호두 나 호두!!" 라고 조르자 헤원이는 그 바쁜 와중에 "내가 엄마냐?" 라고 흘겨보면서도 샐러드에 호두를 넣어주었다. 조리하는데 정신사납다고 먼저 내려가 먹고 있으라는 말에 냉큼 지하실로 내려와 노닥거리면서 문득 생각했다. 요리를 돕는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잘도 주워먹고, 한창 바쁜 집주인한테 이거 해달라니 저거 해달라니 떠들다가 내려와서 먼저 먹고 있는데, 이걸 다른 애들도 당연하게 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최근 호두가 굉장히 먹고 싶었고, 혜원이네 집에는 당연히 호두가 있을 것 같아 오자마자 달라고 했다는 사고의 흐름이 참 웃겼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무례한 손님일 수 있었을텐데, 오래된 친구라 서로를 잘 알고 있구나 싶었다. 여섯 명 중에 셋은 술을 전~혀 못 마심에도 불구하고 항상 술집에서 만나 안주 몇 접시와 함께 수다떠는 것도 남들이 보면 신기해 할 것 같다.
일화2.
옆에서 누군가가 담배피는 것을 참 싫어하는데, 낯설은 사람이나 나보다 윗사람들이 술자리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빼어물면 억지로 참게 된다. 그런 식으로 사회생활을 몇 년째 하다보니, 이제는 누가 담배를 빼어물어도 그 연기가 자욱해지기 전까지는 잘 눈치채지 못한다. 예전에는 칼같이 알아채고 째려보고 나가서 피우라고 요구했었다.
어제 저녁, 홍대 앞에서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는데, 걷고싶은 거리로 이사한 장충족발(언제 이사한거야 도대체!;;;)에서 내 앞자리에 앉은 주현이가 내 쪽을 슬금슬금 보았다. 손가락을 한참 꼼지락거리기에 뭔가 했더니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담배?" 하고 째려보니 "아 진짜!" 이러면서 담배랑 라이터를 들고 영하의 바깥으로 나가더라. 골초들이 가득한 내 동기들이 술자리에서 담배를 안 피우는 건 나랑 같이 놀 때 뿐이지 않을까? 물론 수도없이 잔소리하고 화를 냈던 과거 때문이겠지만 말이다.
막차가 끊길 시간이 되어 먼저 자리를 뜨는데, 성열이와 인섭이가 따라나왔다. 술집 문 앞에서 인사하려고 겉옷도 입지 않고 나온 인섭이는 성열이에게 이끌려 지하철역까지 함께 배웅해주었다. 그러고보면, 최근 1~2년 정도는 술자리에서 내가 먼저 자리를 뜰 때 마다 한두명이 나를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얘네들이 이렇게 매너좋아졌는지 잘 모르겠다.
일화3.
몇달 전 '사과'라는 영화가 너무 보고 싶어서 혼자라도 영화를 볼 심산으로 메신저로 문경이에게 말을 걸었다. 너무나도 흔쾌히 당일 저녁 약속을 잡아준 문경이는 까페에 가자마자 "치즈 케이크 먹을래?" 라고 물어보았다. 저녁을 먹고 만난지라 그다지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문경이가 먹고 싶은가 싶어 그러자고 했다. 카페라떼 두 잔을 홀짝이며 보니 나만 케이크를 집적대고 있었다. "왜 안 먹어?" 라고 물으니, "나 원래 치즈케이크 안먹잖아. 니가 치즈케이크 좋아하니까 시킨거야"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함께 까페에 갔던 게 일 년도 넘은 것 같은데 그걸 기억하고 사주다니, 그 한마디에 감동의 쓰나미가 몰려왔다. 그래서 이제 나도 기억한다. 문경이는 치즈 케이크를 안 좋아한다.
일화4.
보영이가 아니었다면 난 결혼식을 제대로 치르기 어려웠을거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마웠던 날은 함 들어오는 날이었다. 가족행사를 떠들썩하게 치르기 싫었던 내가 결국 아버지의 의지에 살짝 마음이 바뀌어 오후 5시경 "2시간 뒤에 우리 집에 올래? 나 함 들어오는데.." 라고 물어봤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시간을 비우고, 모르는 사람이 스무 명 정도 있는 자리에 망설임없이 와서 잘 웃고 놀다 돌아가준 게 정말 고마웠다. 웨딩촬영 날도, 결혼식 날도 메이크업샵부터 함께 와서 도와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일화5.
"나 결혼해. 여유 생기면 연락할게" 라고 넘어가려다 "우릴 만나지도 않고 결혼할거냐!!" 라는 비난에 결국 저녁에 친구들을 만났는데, 지은이가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왔다. 자정이 다 되어 헤어지면서 그 쇼핑백은 결국 내 손으로 넘어왔는데, 지금 침대 맡에서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3단 조절 스탠드가 들어있었다. 하얀색 레이스 장식 커버에 커다란 큐빅이 둘레둘레 매달린 그 모습은 나라면 절대 고르지 못할 디자인이라 역시 소녀취향 지은이구나 싶었는데, 얼마 전에 만나서 얘기하다보니 "좀 더 화려하고 큐빅 많이 박힌 걸로 사려다가 그나마 가장 무난한 걸로 산거야. 화경이 니 취향 고려해서." 라고 하더라. 나에겐 충분히 화려하고 여성스러워서 낯선 디자인이라 깜짝 놀랬지만, 스탠드가 보면 볼수록 참 예쁘게 느껴지더니 지금은 안방에서 제일 좋아하는 소품이 되었다. 지은이가 선택의 순간 '가장 무난한 것'으로 참아줘서 내가 쉽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크크크
근데 쓰고 보니, 다 선물, 먹을 것, 에 관련된 에피소드인 것 같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