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아버지와 남편.

LEEHK 2008. 12. 15. 23:04

 

 여필종부(女必從夫)라 했다. 계집이 어려서는 아버지를 좇다가, 결혼한 뒤에는 남편을 따른다고 했다. 지금은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현대이기 때문에 옛날과는 관념이 사뭇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의 보호자가 결혼 전에는 아버지였다가, 현재는 남편이 된 것도 사실이다.

 사람이라는 게 상호보완 적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내 보호자라면, 나 역시 그들의 보호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가 내 보호자였고, 내가 아버지의 보호자였다. 물론 첫번째로 어머니가 계시겠지만, 부모님 휘하에 남매가 있는데 남동생과 누나이기 때문에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감정이 강했다. 어쩌면 이게 장녀콤플렉스 일 것이다. 강한 책임감이 짓누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부모님이 강하게 반대하는 남자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당연히 그 남자를 선택하지 않는다." 라고 대답할 정도로, 나는 부모님에게 종속적이었다. 그들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강했고, 부모님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최악의 경우 나 혼자 짊어져야 한다는 부담감에 밤을 지샌 적도 있다. 그러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어린 여자애를 보고 다른 이들은 코웃음을 칠 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장녀이다.

 오늘 친척행사에 아버지가 꽤나 취하셨다. 회사 일이 잘 풀리지 않는지 대취하신 모습과 세상 일 힘들다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예전 같으면 나를 굉장히 옭아매었을 것이다.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한탄하실 때마다, 언젠가는 내가 이 집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나를 눌러댔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랑 달랐던 건, 아버지가 내내 "김서방"을 찾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뿐인 사위이자, 장녀의 남편, 큰사위, 새로 생긴 집안의 큰 아들. 아버지가 힘드셔도, 집안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이제는 장녀인 내가 혼자 책임지던 부분을 사위가 나누어 져 준다. 아버지가 어려우셔도 그 버팀목을 남편과 둘이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이 든든하게 나를 받쳐주었다. 그래서 오늘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그리고 감사했다.

 결혼이라는 건 그런 것 같다. 부모에게 기대고, 부모를 책임져야만 하는 한 사람이, 둘이 되어 그 책임을 나누고 서로를 오롯이 보듬어 안는 것. 내가 남편에게 기대고 그가 나에게 기대는 것은, 부모 자식간의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남편이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책임져 주는 만큼, 나는 그와 그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애정을 느낀다. 하지만 이 것은 위기가 닥치면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지 모른다는 숨막히는 느낌보다는 훨씬 쉽고 즐겁다.

 이 세상에는 내가 나만큼 더 사랑하는 남자가 세 명 있다. 아버지, 남동생, 그리고 남편. ^^

 남편이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고 챙겨주어서 기쁘다. 결혼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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