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책, 내 인생의 동반자

퇴폐주의 decadence 와 상징주의 symbolism

LEEHK 2008. 3. 31. 22:59

  - 퇴폐주의 decadence -


 찰스 디킨스는 ‘힘겨운 시절(1854)’에서 영국형 산업도시를 슬픔과 획일성, 황량함과 추함의 왕국이라고 묘사했다. 산업 사회의 억압, 거대한 익명의 군중을 수용하는 거대 도시의 확장, 미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새로운 계급이 부상함에 따라, 기능성을 중시하는 새로운 기계들의 등장에 감정이 상한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상이 위협 받는 것을 느꼈고, 점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민주적 사고를 적대적인 것으로 지각하여, 자신은 ‘다르게’ 행동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낭만적 감수성의 모든 측면들을 과장하고, 쇠락의 순간으로 그것을 이끌어 극단적인 결과를 만든다. 자신들의 운명과 쇠락하는 위대한 고대문명의 운명, 그리고 이미 야만인의 전리품이 된 로마 문명과 비잔틴 제국의 임종을 평행선상에 놓는다. 쇠락의 시대에 대한 이러한 동경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20세기 초반까지 지속되었다. 이 것을 데카당스(퇴폐주의) 라고 부른다.
 <죽음> 르네 비비앙, ‘사랑하는 여인에게’, 1903.
신성할 정도로 하얀, 길고 가녀린 백합들이 꺼져 가는 촛불처럼 당신의 손 안에서 죽어갔다. 당신의 손에서 희미한 향기가 퍼져 나왔다. 극도의 고통으로 지친 숨결 속에서, 당신의 밝은 옷에서는 서서히 사랑과 죽임이 흩어져 나왔다.

특히 프랑스 퇴폐주의자들은 근대 세계에 대한 저항이 전통적인 카톨릭주의로 나타냈다. 그러나 퇴폐주의적인 종교성은 오로지 의례적이고 모호한 측면만을 포착하며,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병적인 관능성으로 바꾸게 된다. 퇴폐주의자들의 전도된 종교성은 악마주의와 같은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여기에는 초자연적인 현상, 마술적이고 신비한 전통의 재발견, 진정한 헤브라이적 전통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유대 신비주의, 예술과 삶에서의 악령의 현존에 대한 높은 관심뿐만 아니라 진짜 마법을 실행하여 악마를 불러내는 일에의 참여 등 온갖 감각의 방탕함에 대한 찬양, 악에 대한 호소, 사악하고 불안하고 잔인한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매력 등을 다루는 악의 미학이 있었다.

 

  <올랭피아>, 에두아르 마네. 1863, 파리, 오르세 미술관.

 


<공포에 대한 취미> 샤를 보들레르, ‘사랑에 대한 위로의 격언’, 1860~1868.
호기심 많고 타락한 어떤 사람들이 추에서 느끼는 쾌락은, 미지의 것에 대한 갈망과 공포에 대한 취미라는 감정에서 시작된다. 우리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러한 감정의 싹을 지니고 있으며, 이 감정은 시인들을 해부실이나 병원으로 달려가게 만들고 여자들을 사형 집행장으로 달려가게 한다.

이 시대에는 예술작품이 존재해야만 미가 존재한다. 오직 인공적인 것만이 아름다울 수 있다. 휘슬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은 습관적으로 실수를 범한다.’ 그리고 와일드는 이렇게 선언한다. ‘예술에 대해 탐구할수록 자연에 대한 관심은 더욱 줄어든다.’ 예술의 창조적 힘에 대한 이러한 깊은 확신은 퇴폐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퇴폐주의 예술가들은 미란 오랫동안 애정을 바친 장인적 작업의 대상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플로레르의 ‘천재는 오랜 인고의 결과이다.’)을 거쳐 인공적이면 인공적일수록 더욱 값어치가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예술이 제 2의 자연을 창조한다는 생각이, 자연에 온갖 폭력을 가한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으로 연결되게 된다. 퇴폐주의의 미에는 타락, 졸도, 극도의 쇠약, 무기력 같은 것들이 스며들어 있다.

 

 

 

- 상징주의 symbolism –

 

 자연은 상징의 숲이다. 색상과 소리, 이미지와 사물들은 신비한 유사성과 조화를 연상시킨다. 시인은 이런 비밀스러운 언어의 해독자가 된다. 미는 시인이 발굴해야 할 숨어 있는 진실이다. 실제 사물의 너머에 있는 우주를 열어,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일종의 비밀스러운 영혼을 전달해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인의 행위는 시를 통해 사물들이 전에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가치를 사물들에게 부여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초월적인 것을 향한 플라톤적 긴장이 존재하지만, 동시에 시를 마법적인 행위이자 예지적 기술로 보는 의식이 들어나고 있다.
<시의 기술> 폴 베를렌, ‘시의 기술’, 1874.
음악은 모든 것을 초월하므로, 그대 이 때문에 음악을 사랑하며 한없이 우아하고, 대기 중으로 용해될 수 있는 음악을 배운다.
 아무것도 없이 그 속에서 휴식하고 또 휴식하며, 색상이 아니라 순수한 뉘앙스를, 오로지 뉘앙스만을 우리가 원하기 때문이다. 오 뉘앙스여,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여, 꿈속의 꿈이여, 피리 중의 피리여.
다시 음악으로, 그리고 또 다시! 그대의 시는 도둑질한 것, 높은 하들을 향해 또 다른 하늘을 향해 고양된 영혼에서 도망친 것이라 말할 수 있으리.
그대의 시는 아름다운 모험, 가벼운 아치 바람에 실려 날아가며 박하와 백리향을 스쳐 지나는…. 그리고 그 나머지는 문학이다.
상징주의는 전 유럽을 관통했던 강력한 사조로, 오늘날까지 그 아류들이 등장하고 있다. 사물들이 계시의 원친이라는 방식으로 현실을 이해하고 있다. 하루 중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가 어떤 대상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갑작스러운 사건에서 사물들이 우리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주는 순간들이 있다. 그것은 그저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강렬함으로 나타나며, 의미를 가득 담고 제시되어 우리는 그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한 완벽한 경험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스티븐은 ‘최고의 예술가는 이미지의 섬세한 영혼을 에워싸고 있는 제한된 상황이 그물망에서 그 혼을 정확하게 해방시켜 그 새로운 임무에 가장 부합하는 것으로 선택된 예술적 환경 내에서 그것을 다시 재현해 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라고 한다. 보들레르의 다음과 같은 말은 이러한 모든 흐름의 근저에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우주는 이미지와 상징들의 목장이다. 상상력은 그것들에 자리를 마련해 주고 상대적인 가치를 부여한다. 그곳은 상상력이 소화하고 변형시켜야만 하는 일종의 목초지이다.’

 

<눈먼소녀>, 존 에버렛 밀레이, 1856, 버밍엄, 시립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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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통신으로 쓴, 움베르트 에코의 미의 역사 레포트.

3만 9천원이라는 가격에 걸맞게, 그득그득한 올컬러 화보집과, 문학작품 발췌 단락들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반면, 정돈되지 않은 번역체가 다소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