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HIIE 체육대회, 과티도 사지 못한 채 불참하다.

LEEHK 2007. 9. 29. 00:38

 학부시절, 과티를 두 번 만들었다. 미술 실력 없는 주제에 도안을 짜고 팩스로 넣어 주문한 과티가 백여장 찍혀 단체로 입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굉장히 뿌듯했다. 원생시절과 졸업 후, 무슨 일이 있어도 체육대회는 참가했다. 데이터마이닝 학회와 겹쳤던 작년에는 저녁에 애인까지 끌고가서 새벽까지 놀았다. 그 때 애인은 선배들이 흔히 그렇듯, 바가지에 바가지를 쓴 돈으로 과티를 사서는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아직 석사 과정중이라는 이유로 정가보다 조금만 비싸게 산 나의 두 배에 달하는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며, 고맙게도 애인은 우리 과 후배들과 즐겁게 어울려 놀았더랬다. 자신의 과티는 단 한 번도 산 적 없으면서 산공과 과티를 샀다며 몽골팀 엠티에 자랑스럽게 입고가서 사진도 잔뜩 찍고 돌아왔다. 가끔 놀러갈 때 둘이 함께 우리과 과티를 입으며 커플티라고 좋아라 했다.

 어리버리 신입생으로 참가해, 술먹고 넘어져 피투성이 팔꿈치로 밤을 새고 난 뒤 아침에 다함께 다락투 닭곰탕으로 해장국을 마시고 첫 지하철로 집에 갈 때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술값에 돈을 보태주고 새벽에 체력 저하로 택시타고 돌아가는 전형적인 졸업생 선배가 되어버렸다. 그래도 마냥 좋더랬다.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라도 과 행사에 열심히 뛰댕기는 모습을 보면 그리 이쁘고 잘 해주고 싶고 그랬다. 오랫만에 보는 선배후배동기들도 정말 반갑고, 오랫만에 부르는 과가는 정말 가슴이 벅차오른다.

 재학 시절에 쏟은 열정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어, 때론 이것이 미련인가 싶기도 하다.

 연락 착오는 있을 수 있다. 사람이 하는 것인데 실수가 있을 수 있다고 당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하는 것과 서운함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일주일 전에 연락하면 직장인들이 시간을 비우고 과 행사에 참여해줄 거라 생각하는 그 안일함이 (이 문제가 별개 올해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과거의 착오를 수정해주는 역사의 지짐대가 없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직장인들에겐 최소 2주 전, 아니 한 달 전에는 연락해서 선약을 잡아놓아야 하건만, 어째서 계속 반복되는 것일까. 우리과가 너무 술만 먹나? 그리고 그나마 일주일 전에 연락을 시도하면서도 나같은 사람에게 연락을 빠뜨렸다는 것도 너무 안타깝다. 나도 연우오빠도 윤승에게도 연락이 안 갔다면, 도대체 누구한테 전화를 한 것일까. 조금만 더 일찍, 와 달라는 전화 한 마디면 만사 재쳐두고 달려갈 사람들을 빼먹은 행사가 과연 순조롭게 진행될까도 걱정이 된다. 선배들이 가야, 비싼 돈으로 과티도 사고, 2차도 사주고, 교류도 하고, 재학생들에게 유용한 정보도 나눠주고 좋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또 걱정되는 건, 이렇게 올해 행사를 빠져버리면, 과연 내년에 전화와서 갔을 때, 내가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런지 하는 사실이다. 재학생들이 모르는 아이들이 되어버리면 즐겁게 놀 수 있을까?? 매년 가야 봤던 얼굴을 또 보고 또 보고 할텐데 말이다. 사실 1학년이보다 2학년 집부들을 더 보고싶은데, 아아- 공백이 생겨버리면 거리가 생겨버리고, 그러면 멀어지겠지.

 크크. 진짜 서운하다. 너무 서운해서 무슨 헤어진 뒤에도 미련을 떨쳐내지 못하는 유행가 가사 속 폐인같은 기분이다.

 나는 상당히 고통에 민감해서, 내가 고통스러울 바에는 그 원인을 잘라내버린다. 더이상 서운하지도 않고 둔감해지는 시기가 언제 오느냐에 따라서 내 미련의 크기를 알 수 있겠지. 사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 챙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과에 대한 이 애정으로 힘든 나머지 그 크기를 잘라내려고 시도한 것이 벌써 5년 째에 접어든다. 내년 쯤에는 성공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리고 그 내 예상이 또 나를 꽤나 서운하게 한다. ... 이 말인 즉슨, 내년 초반 행사에 와달라고 전화가 오면 또 냉큼 달려갈 과거의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또 헤어질 시기가 유예되겠지. 과연 올해는 단 한번도 제대로 받지 못한 전화가, 내년엔 제대로 올 것인가 .^_^ 안 오면 정말 끝인데. 밀고 당기기 하는 연인도 아니고, 이게 뭔 낯부끄러운 끄적임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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