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생업.

LEEHK 2014. 7. 26. 22:24

재작년 심장이 덜컹 내려앉은 일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자동차가 폐차 직전까지 갔었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옆으로 여러 번 굴렀는데, 나무들이 제동장치 역할을 해주면서 낭떠러지 직전에 멈출 수 있었다. 다행히 운전석 박스가 튼튼히 버텨주어 아버지 몸은 다치지 않으셨다. 보험 처리하고 집에 들어오신 아버지의 짐 속에서 블랙박스 메모리를 찾아내고는 보려고 몇 번이나 시도했으나 도저히 심장이 떨려서 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새로 차를 사실 때도 같은 브랜드 같은 차종의 신형 모델로 구입하시게 하였다. 내 아버지의 생명을 구해준 차종이니까 안전이 보장되는 기분이었다. 더불어, 나무에게 고마웠다. 조경업에 수십 년 종사하신 아버지를, 나무들이 구해준 것 같았다. 아무리 차가 튼튼해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건 다른 문제가 되니 말이다. 나무와 평생 함께하신 아버지를, 나무들도 사랑해주는 것 같아서 정말 고마웠다. 지금도 간혹 나무들을 보면, 우리 아빠 지켜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며칠 전 일산 어머니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미친 차가 골목길에서 보지도 않고 빠르게 우회전하다 걸어가는 어머니를 받았고, 어머니는 바닥으로 밀쳐져 큰 일 날 뻔 하셨다. 다행히 들고 가시던 커다란 화장품 가방에 차가 받히고, 다른 화장품 가방은 베개 베듯 어머니 머리 밑에 들어가 준 덕분에, 근육통 이외에는 큰 탈이 없으셨다. 나중에 가방 열어보니 화장품 박스만 찌그러져 있었다 하셨다. 충격을 그 박스가 완충해주지 않았으면, 맨 바닥에 어머니 머리가 부딪쳤다면, 상상하기도 무섭다. 며칠을 불안함에 떨었다. 그러면서도 화장품이 우리 어머니 목숨을 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몇십 년 화장품 방문 판매를 하시며 가정을 꾸려오신 분이다. 패션과 최신 유행에 나보다도 빠르시고, 항시 가족들의 화장품을 떨어지지 않게 챙기시며, 트랜드에 무관심한 며느리에게 때때로 예쁜 아이템들을 사다주신다. 큰 일이 날 뻔한 순간에 그 화장품들이 충돌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어머니를 구해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게도, 그 물건들도 어머니를 사랑한 게 아닐까 싶다.

 

 

 

오래 산 나무에는 신령이 깃든다고 했다. 긴 시간을 보낸 것들에는 신비로운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성남 아버지와 일산 어머니 모두 사고에 비해 천운에 가깝게 무탈하셨다. 이는 생업으로 몇십 년 동안 함께한 것들 덕분이라 생각한다. 끈기있게 지속적으로 해내는 것이 그렇게 굉장한 일이라는 증거이리라. 꾸준히 하는 것, 오래 함께 하는 것, 길게 유지하는 것, 가장 어렵고도 가치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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