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소방훈련.

LEEHK 2014. 6. 22. 09:46

금요일 낮에 민방위 훈련이 있었다. 이번에는 진짜 대피하라는 공지가 뜨고, 처음에는 가볍게 생각했으나, 정말 이 건물에 불이 나면 그 혼란 속에 어찌 행동해야 할 지 미리 연습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가르쳐주는대로 따르기만 하는 시대는 아니지 않는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으면 안되지 않는가. 혼자 판단해서 영민하게 움직이려면 이런 훈련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앵~ 벨이 울리고 사람들이 슬렁슬렁 움직였다. 어찌나 여유롭고 차례차례 양보하며 다니는지, "불 나면 이미 다 죽었다~" 라는 누군가의 농담이 들릴 정도로 질서정연하게 뒤편 주차장으로 나갔다. 한 낮에 부채질을 하며 오랫만에 마주친 사람들과 수다떨고 있으려니, 건물 직원 분께서 소화기 쓰는 법 설명을 해 주시며 쏴볼 사람! 을 모집하고 계셨다. 옆 팀에 CPR 자격증 있으시다는 분이 뛰어나가 먼저 하시고, 두번째로 자원해서 쏴 보았다. 뭐든 쉬운 게 당연하지만, 급박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고 안전핀을 뽑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굉장히 안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피 훈련을 해보고, 소화기 쏘는 실습도 해 보았다. 이런 훈련이 미리 되어 있어야 위급시 무능하지 않을 수 있다. 나 하나 스스로 건사하고, 운 좋으면 주변의 두서넛 구할 수 있다면 정말 좋은 것이겠지.

 

 

민방위 훈련에서 숱하게 하는 거라며 남자분들은 뒤로 빠져 있었고, 여자들은 비교적 신선하다며 중앙에 모여 있었다. 작년인가 집 근처 모 어린이집에서 커다란 화재가 있어 건물은 많이 손상되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안전했다. 평소 정기적으로 소방 대피 훈련을 했고, 위급시 선생님들이 잘 판단하고 지휘해주신 덕분이리라.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에서도 한두달 간격으로 정기적인 소방 대피 훈련을 한다. 집에 온 아이는 입을 가리고 웅크리고 걸어가며, 이렇게 대피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 모습을 보는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들 시설 대피 훈련을 규정으로 삼은 국가 기관과, 성실히 수행해주시는 어린이집에 정말 크게 감사하게 된다. 안심되고 고맙다.

 

 

설마 별 일 있겠어. 라는 생각에 눈가리고 아웅 하던 훈련과 구조장비 들이 실전에서 얼마나 무용했나를 보았다. 이런 본격 대피 훈련을 하고, 그런 과정에 참여해서 훈련된 사람들이 막연히 구조대에 의존하기보다 본인의 판단에 따라 위급시 기민하게 움직이며, 본인과 서로를 구한다면,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스러져간 그 아이들의 존재감이 세상을 더욱 바르고 의미있게 바꾸어나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건, 이런 훈련들이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상시 운영되어야 하는 것일테다. 아이들을 지키려면, 상식이 상식적으로 움직이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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