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엄마의 그릇.

LEEHK 2013. 10. 13. 22:49

'신은 감당할 수 있는 엄마에게 아픈 아이를 준다'고 했다.

그 말 하나를 부여잡고, 견딜 수 있는 만큼만 오겠지- 하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이 정도는 견딜 수 있는 그릇일거야, 견딜 수 없는 만큼은 오지 않을거야, 계속 되뇌인다.

 

 

 

 

오늘 신랑이 말했다.

"물론 나도 잘못했지만, 자기 어제 오늘 말을 심하게 하는 것 같아."

머리를 뎅- 하고 맞은 것처럼 굉장히 부끄러웠다.

가장 가깝고 존중하는 이에게 왜 이렇게 날카롭게 구는걸까.

 

 

 

 

밤이 되어 다시 열이 오르는 아이의 머리에 이마를 마주댄 신랑이 말했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싶다."

이 말을 모든 부모가 하는 것이겠지.

그렇고 그런 부모가 되기 위해 이 시간을 겪는 거겠지.

시간을 쏟아붓고, 체력을 소진하며, 심력과 수면을 내어주며, 우리는 생명을 키우고 있다.

 

 

 

스트레스를 받는데 도망칠 구석이 없으니 유일한 말초적 쾌락인 금전적 소비라도 해야 속이 풀릴까 하며 울컥 울컥 하던 참에, 주말에 건수가 생겼다. 신랑은 대중교통 어려운 곳에 출근하고, 나는 아이 데리고 병원을 가니, 차 한대를 누가 쓰느냐 하는 문제가 생겼다. 홧김에 하나 더 사! 하며, 무도에 나온 노오란 벨로스터를 고민하다 최종 결정 직전에 간신히 참았다. 아무리 할인률이 높다 해도 충동구매가 너무 과하다. 근데 계속 이런 식이면 쌓인 울화를 풀기 위해 정말 젠쿱이나 폴로라도 사겠다.

 

 

 

중심에 집중하고 주변을 놓는 훈련을 가혹하게 받고 있다. 아무리 노력 해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에 삶이 좌지우지된다는 것은, 사람을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감당할 수 있다고 누군가 믿어주었기에- 아이가 어리기에- 모든 아이들이 다 이런 식으로 자란다고 하기에- 어떻게든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괴로움의 총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돌진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의욕적으로 공격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시기가 있다. 반면에 수세에 몰려 어떻게든 현상유지를 하고자 온 힘를 쏟아부어야 하는 시기가 있다. 지금은 버티는 게 우선이다. 내가, 아이가, 신랑이, 가족이- 일상이.

 

 

 

답은 내 안에 있다. 간혹 고민된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집어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도 있다. 내 그릇은 못난이 엄마 역할로 포화상태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열이 나 색색거리며 자고 있는 조그만 생명체 저 놈 하나다. 눈 앞에 닥친 폭풍우에 기존의 생활이 휩쓸려가지 않도록 기력을 쏟는 것이 최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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