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긴고아.

LEEHK 2013. 5. 28. 02:03

늦게 퇴근해서 간신히 잠들었는데, 거실에서 목소리가 들려 깨어났다. 술 드시고 친구분을 데리고 오신 아버지의 목소리. 거실과 방 사이 방음이 잘 안 되는 구조라 도저히 잠이 다시 들지 않아 밖으로 나갔다. 원래 아버지 술 친구분 오시는 걸 안 좋아하지만, 한 번 오시면 또 접대는 잘 하는 딸래미이다. 하지만 자정이 훨씬 넘어 새벽인 시간이고 목소리가 큰데다가, 대화의 주제가 불편한 것이어서, 나중에 낮에 오시면 접대 잘 해드리겠다고 죄송하다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합가를 한 지 벌써 3년이 되어간다. 3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 그냥 눈감아 드릴 수도 있었을텐데, 늦은 시간이어서 가족들의 숙면을 위해 아버지의 체면을 살려드리지 못했다. 딸 미안하다- 반복하시는 아버지, 너 왜 자식에게 미안해하냐 그럴 바에 자기는 안 산다- 이런 아저씨. 도대체 뭐하는 아저씨길래 자정 넘어 남의 집에 술쳐먹고 오시는 지 모르겠는데, 처음 보는 분이고 아버지가 대취하신터라 그냥 무표정하게 있었다. 요즘 일이 많아 일찍 출근해 늦게 퇴근하는 딸이 걱정되셨는지 들어가 자라 미안하다 하셨지만, 들리는 목소리 때문에 잠이 안 온다 하니, 결국 친구분을 보내셨다. 자다 깨서 방에서 나온 지 10분 안에 상황 종료. 아저씨를 데려다준다 하셨지만, 아버지께서는 못 나오시게 중간문을 닫아버리고 내가 배웅했다. 비오는 한밤중에 교통 편치 않은 이 동네에서 어찌 가실까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마음이 불쾌했던 터라 현관에서만 인사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아버지를 끌고 옷방으로 들어가 손을 잡고 바닥에 앉아 한 시간을 대화했다. 분명히 필름이 끊기셨을 것 같은 상태라 긴 대화해봤자 기억 못하실 게 분명했지만, 안 그러시던 분이 평소 절친도 아닌 아저씨를 자정 넘어 집에 데리고 오실 정도면 필히 요즘 속상한 일도 있으시고, 외로우실 것 같았다. 사람이란 당연히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치고 쓸쓸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우리 아버지의 마음 한 구석을 채워드리고 싶었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아버지도 가족을- 자식들을- 사위을- 특히 손주를- 사랑하신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요즘 사업을 크게 벌리셔서 힘들어하시는 게 너무 싫어 그만 적당히 용돈 벌이나 하시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목표를 향해 달리고 계시다는 긴 설명을 들었다. 목표라는 건, 재산을 불려 딸과 아들에게 똑같이, 번듯하게 물려주고 싶으시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아들 딸 돈벌이 하니까 그런 생각 말고 20대, 30대, 40대, 50대 전체를 송두리째 치열하게 사셨으니, 이제 본인 삶 건강하게 즐기며 사시라고 설명해도, 아버지 마음은 그렇지 않으시단다. 난 그냥 건강하게 내 옆에 오래 계시면 좋겠는 마음 하나인데- 부모의 어깨에 짊어진 무게란, 자식이 직장인이 되어 경제활동을 해도, 결혼을 해서 살아도 줄어들지 않는다보다. 그리고 한숨이 한 번 더 나온 것은, 나 역시 이제 아이 하나를 키우고 있기에, 나도 저렇게 평생동안 아이를 짊어지고 살아가게 되는건가 싶은 달콤씁쓸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취한 상태에서, 자식들이 너 힘든 거 몰라준다, 니 능력 알 것 같냐, 자식 가족 다 필요없다, 부추기는 아저씨를 옆에 앉히고도, 자다 깬 딸래미가 불편한 기색으로 왔다갔다하니, 내일 출근하려면 얼른 자라고 체면이 구겨지심도 참고 친구분을 빨리 보내셨다. 사실 안 데려오시는 게 가장 좋았겠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닌데다가, 친구분께 그만 가라- 하시는 순간 아버지는 딸을 사랑하고 배려하시는구나 다시금 생각했다. 아버지가 취해 들어오시면, 그 세대 어른들이 다 그렇듯, 제어 불가능한 상태가 종종 되시는데, 그 와중에도 딸램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신다. 그래서 가족들이 나의 부재를 가장 안타까워 하는 날은 아버지가 취하신 밤이다. 이는 절대 아버지와 친구 같다는 의미가 아니라- 딸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딸에게 너무나 특별한 사이라는 것이다. 이 분이 부디 건강하게 내 옆에 오래 계시면 좋겠다. 식사시간에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려, 밥을 혼자 늦게 먹겠다고 하면, 벌컥 화내시는 것 같은 목소리로 "빨리 와서 먹어!!" 하시며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를 납치하듯 채가신다. 그리고 아이를 봐주시다 교대하고 늦게 드신다. 손주가 제일 이쁘다 하시는 그 마음도 감사하다. 내가 낳은 내 아이를 사랑해주시는 분에게 어찌 감동하지 않으리. 철부지 어릴 적에는 얼른 커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아버지의 기둥 밑에 있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부족한 스페어 타이어와 같은 기분이다. 아버지의 우산 속에서 그 분의 애정과 보호와 노력에 안온하고 감사하지만, 어서 더 열심히 자라서 이제 선수교체 해드리고 싶다. 큰 딸은 살림밑천이라는데, 열심히 살아오신 보상으로, 본전 뽑게 해드리고 싶다. 이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원동력이자, 많은 것들을 억제할 수 있게 하는 손오공의 머리띠 긴고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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