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휴가.

LEEHK 2012. 8. 20. 17:48

 

피같은 휴가를 썼다. 아침에 38.7도를 보는 순간 출근할 마음을 접었다. 지난 번에 38도를 우습게 보고 타이레놀 먹고 출근했다가 집에 오는 버스에서 울었던 기억이 생생하여, 팀 마플에 휴가 신청을 하고 함께 일하는 분께 오늘 잡힌 회의 일정을 미루도록 연락 부탁드렸다.

오한에 덜덜 떨며 이불에 누워 전화영어를 했다. 월수금 오전 10분씩 필리핀 3세 아이 엄마 제니와 통화하는데, 회사 지원 수업이고 미수료시 내 돈을 뱉어내야 한다. 예습을 안 해서 그런지 평소보다 덜 들려, 필리핀인의 발음이라 안들리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10분 통화를 마치고 나니 매우 지쳤다. 평소 출근 길 지하철 역에서 영어만 써야하는 대화도 참 신경이 곤두서는데 아플 때 집에서 하는 통화도 만만치 않다.

올해 최고의 웹툰 미생 최근화에 보면 "애비가 되어서 건강관리 안 하는 건 인정 못 해." 라는 대사가 나온다. 오늘 아픈 딸램과 열은 없지만 아직 중이염인 손자를 태워 병원 진료 다녀와주신 우리 아부지를 보며 다시 한 번 느낀다. 우리 아부지 편찮으신 모습은 거의 보지 못 했다. 딸램이 애엄마가 되어도 챙겨 보살펴주실 정도의 체력이 거뜬하시다. 애도 아프고 신랑도 아파 간호하느라 잠 설치랴, 회사 장거리 출퇴근하랴, 비명 지르고 싶을 정도로 바빴다는 핑계로 체력 관리를 못 한 게 아닐까. 애비 뿐만이 아니라 애미 역시. 부모가 된 주제에 건강관리 못 하는 건 인정 못 한다.

 

신랑과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대화를 나누는 주제는 일과 가정과 돈의 균형이다. 워낙 가진 것 없이 시작했기에 어서 벌어 종잣돈 좀 마련해야 하지만, 자린고비 일벌레처럼 살고 싶지는 않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수준의 급여와 시간이 확보되는 인생을 살기 위해 마음을 조절하고 있다. 연차가 쌓이다보니 과중해지는 업무와 책임 사이에서 신랑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가정으로 돌아온 순간 회사 생활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그런 삶을 살자고 계속 이야기 한다.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는 쉽게 실현되는 일이 아니라서다. 가족이 모두 건강하기만 해도 그럭저럭 잘 흘러가지만, 우리 중 그 누구라도 아픈 순간 모든 리소스가 그리로 투입되며 삶의 평화에 균열이 생긴다.

 

건강해야한다. 잘 먹고 푹 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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