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양가친척 행사 다니랴, 지인들의 결혼식과 돌잔치 다니랴, 정신없이 살다보면 간혹 억울해진다. 평일 직장생활에 집중하기 위해서 왠만하면 휴식시간을 많이 갖고자 신경썼다. 집에서 5분 거리 양재천도 지난 주에 간신히 한 번 다녀왔다. 새벽에 출근버스를 타고, 지방까지 멀리 출장도 다니는 신랑이 안타까워 많은 부분에서 배려하고 싶었다. '나는 안 챙겨도 돼, 급한 건 우리 건강이고 체력이야.'
결혼 후 내 첫 생일, 신랑이 직장동료 빙부상으로 장례식장에서 돌아온 게 밤 10시였다. 다음날 경주 출장으로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실 분이라 11시에 그냥 재웠다. '난 그런 거 기념일 크게 염두에 두지 않잖아. 잠을 잘 자야 회사에서 덜 힘들지.' 라며 웃으면서 넘어갔었는데, 결혼 후 첫 생일을 아~무 일 없이 그냥 지나간게 무의식중에 서운했었나보다. "내일 화이트데이인데 내가 집에 하루종일 집에 없어서 미안하네, 가게 들어가서 아무거나 골라 내가 다 사줄게" 라며 실실 웃는 신랑을 보는 순간 짜증이 벌컥 났다.
"아무거나 골라" 라고 말하면 "돈아까우니 집에 가자. 필요하지도 않은 거 뭘 사." 라며 항상 고르지 못하고 넘어가는 나를 모르는건가? 내 평소 행동을 기억 못하나? 가게에 들어가서 본인이 '아무거나' 사서 오면 안 되나?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를 위해 5분도 고민 못 하나? 월요일인 내 생일을 못 챙겨주었으면, 주말에라도 챙겨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나보네, 이번 주말 내내 밖에서 약속을 잡는 것을 보니. 나는 아직 생일 케익도, 선물도 아무것도 받지 못 했다.
순식간에 가라앉은 기분에 "왜 맨날 나한테만 고르라고 그래? 당신 리소스 써서 당신이 고르면 안돼? 이번에도 내가 못 고르면 그냥 넘어가려고 그러지? 나 먼저 집에 갈테니까 아무거나 골라서 사서 들어와." 라며 냉정하게 내뱉고 돌아서는데, 어이없게도 눈물이 줄줄 났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옷도 갈아입지 않고 냉장고에서 레페를 꺼내 벌컥벌컥 마시니 기분이 조금 진정되더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기왕 사는 거 내 맘에 드는 걸로 사주고 싶었겠지. 워낙 착하고 부드러운 사람이라 배려가 지나치게 깊을 뿐이다. 악의가 있거나 일부러 무심한 것이 아니고, 그저 내가 '괜찮다'고 했으니 '괜찮다'고 믿은 것 뿐이겠지. 내 말과 행동이 문제구나 싶기도 했다. 우는 애기 젖준다. 그저 괜찮다고 웃으면서 넘어가기만 하면, 신랑이 눈치 못 채는 사이 내 안에는 감정이 쌓여나갈 것이다. 이 문제를 여기서 풀지 못하면 후일 사소한 일에 벌컥 화를 내게 되고, 신랑은 뭔일인지도 모르면서 뒷통수를 맞겠구나 싶었다.
두번째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낼 즈음, 초인종 소리가 났다. 길리안 초콜렛과 함께 몇 년 만에 꽃다발을 받았다. 프리지아 한다발에 겨우 오 천원 밖에 안하는데 자신이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 했다. 케이크보다 더 좋은 걸 해주겠다며, 한밤중에 도시락반찬 3종 세트를 요리하는 신랑의 뒷모습을 보며, 엎드려 절받고 있는 이화경은 아까 서운함을 속사포처럼 내뱉었던 게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 행복해졌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웃으면서 넘어가면, 오히려 백년해로에 방해가 될 것이다. 때로는 화도 내고 때로는 고마워하며 좀 더 솔직하고 많은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살고 싶다. 주변에 맞춰 돌아가다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것 뿐인데, 신랑은 마주 화를 내고 변명하기보다 미안하다며 사과해주어서 고맙다. 앞으로도 자주 챙겨주고 아껴준다니, 그 말을 믿고 나도 더 잘해야 겠다.
나 안 챙겨준다고 팩! 하고 화를 낸 효과는 상당히 컸다. '말하기 전에는 챙겨줄줄도 몰라?' 라며 칭얼대기보다 그냥 솔직하게 기뻐하고 자랑하련다.
금요일 저녁, 신랑표 도시락반찬 3종 세트. 계란장아찌, 마른새우고추장볶음, 어묵간장볶음.
금요일 저녁, 몇 년 만에 받은 프리지아 꽃다발.
친구모임을 마치고 토요일 밤 10시에 들어온 신랑이 케이크에 내 나이 만큼의 초를 꽃아 들고왔다.
5일 늦었지만 -_- 생일축하 노래도 들었다.
초의 불을 훅! 하고 끄자, 신랑의 주머니에서 나온 은 소재 목걸이 귀걸이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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