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현재를 찍다

시간을 꽉 차게.

LEEHK 2021. 6. 13. 03:05
병원에서 더이상 시도할 수 없는 치료 방법이 없다고 하여, 집으로 돌아오셨다. 퇴원하시니 주말마다 찾아뵐 수 있게 되어 좋으면서도, 순간 울컥 울컥 올라오는 것들을 삼키기 어렵기도 하다. 만지고 귓가에 이야기들을 속삭일 수 있어 감사하지만, 어머니 목소리를 다시 듣기 어렵다는 것이 너무 슬프다.

지난 주 찾아뵙고 돌아온 뒤,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처음 만나뵈었을 때, 그리고 가장 최근에 어머니와 통화 했을 때, 함께 했던 많은 순간들이 문득 문득 떠올랐다.

사적으로는 시어머니이시지만, 사회적으로는 워킹맘 선배님이기도 하셔서, 내면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고, 조언도 받았었다.
어머니를 못 뵙게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나는 어디다 이런 속 이야기들을 하고, 애정과 공감을 받지 하는 상실감에 막막했다. 따뜻한 둥지를 잃어버린 기분이다.

세 아이를 두고 떠나는 어머니 입장에서 생각을 여러 번 해 보았는데, 마지막까지 눈에 밟히는 건 애들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어머니께서도 아들 딸 걱정을 많이 하셨었다. 반면에 며느리에 대한 신뢰는 굉장히 강하셔서, 신랑에게도 “너는 화경이 하자는대로만 해라.” 라고도 하셨었고, 언니가 집을 구할 때도 나를 슬쩍 부르시고는 “니가 따라갔다 와. 니가 같이 가야 안심될 것 같다.” 라고 하셨었다. 병원에 입원해 계신 설 연휴에, “니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라며 조심스럽게 떡국 끓이는 법을 알려주셨고, 설날 아침에 떡국 잘 끓여 나눠먹었다 보고 드리니 정말 기특해하셨다.
강산이 바뀌고도 남는 긴 시간동안 칭찬도 많이 해 주셨고, 응원과 위로, 힘들면 그만 하라고 말려도 주셨다.


어머니 마음 편하시도록 걱정을 덜어드릴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어머니와 정말 헤어지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을지, 다듬어 정리하고 여러 번 머리 속에서 시뮬레이션 했다.


오늘, 어머니가 눈을 살짝 뜨셨길래, 귓가에 그 내용을 속삭였다. 눈을 뜨고 감으시지만, 눈동자를 움직이지는 못하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 이야기를 하는 동안은 눈을 또렷하게 뜨셨고, 눈동자를 움직여 내 쪽을 바라보시기도 했다.
긴 편마비 기간 탓에 고개가 한 쪽으로 기울어 계셔서, 스트레칭 목적으로 반대쪽에서 말씀을 드렸는데, 고개 방향이 평소와 다르게 천장 쪽을 향해 계셔서, 잘 보이지 않는 귀가 위로 올라와 있었다.
작게 목이 울리는 소리를 내시기도 했다. 마치, “고맙다. 너만 믿는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내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계신다고 느꼈다. 입가가 살짝 움직일 때는 미소지으신다고 느꼈다.


큰애는 이제 할머니 키를 넘어섰다. 늘 하듯, 서서 키재기를 못 하니, 할머니 곁에 살짝 몸을 눕히더니 키가 이제 비슷하다고 다정하게 이야기하며 할머니를 안아드린다. 철 없는 둘째는, 할머니 전동 침대에 올라가 천장을 향해 비상하는 걸 좋아한다. 할머니 무릎 사이에서 리모컨을 조종하는 저 아이를, 우리 어머니께서 건강하셨다면, 얼마나 사랑스럽게 웃고 안아주고 뽀뽀해주셨을까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눈물이 솟아 잠시 자리를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무서운 교모세포종, 각오한 순간이지만 너무 어렵고 속상하고 슬프다. 그래도, 어머니를 만지고 그 귓가에 이야기를 속삭일 수 있도록, 버텨주시는 것에 감사드린다.


시간은 너무 빠르고, 짧다. 소중한 걸 놓치지 않도록 꽉 차게 보내리라. 그러다 마지막이 오는 순간, 후련하고 자유롭게 떠날거다. 난 이제 자유다 라는 해방감을 느끼면서.

우리 어머니도, 좋은 꿈으로 행복하게 주무시며, 간혹 깨어나실 때에는 사랑하는 아이들의 스킨십과 목소리를 들으시고 보기도 하시다가, 떠나게 되실 때, 훨훨 후련하시기를 바란다. 며느리가, 어머니께 말씀 드린 것들 다 지킬 수 있도록 열심히 살아갈테니, 믿고 남은 시간을 편안하게 지내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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