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 교회에서 위탁 운영 중인 람이네 어린이집의 큰 행사다. 선생님들이 갖가지 장식을 하신 과일과 야채 등으로 정말 멋진 커다란 상이 차려지고 모든 아이들이 기념 독사진을 찍는다.
람이는 집에 있기로 했다. 버터 사건 이후로 몸이 조금 예민해져 있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람이가 눈치채지 못 하는 뺨의 콜린 네 개가 뜨는 사건, 어린이집 하원 직전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이 연달아 있었다. 추수감사절의 점심 식단은 형님반 아이들이 열심히 만들어 준 치킨꼬치, 샌드위치, 까나페 등이다. 람이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조그만 아이들이 먹다가 부스러기를 흘릴 가능성이 농후한 메뉴이다.
추수감사절 이틀 전 식단에도 람이가 먹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오전 간식, 오후 간식, 점심 반찬을 빵빵하게 싸서 보냈다.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서는 추수감사절 역시 그렇게 챙겨 주시면 신경써서 먹일테니 아이를 보내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해주셨다. 따뜻한 배려가 정말 감사하고 감사했다. 이틀간 머리 터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내년에 좋아지면 참석할 수 있겠지. 올해는 안 보내고 내가 데리고 있으마." 라는 친정 어머니 말씀 덕분에 결정할 수 있었다. 보내지 않았다. 아이의 단체생활의 좋은 기회를 알러지 때문에 놓치게 하고 싶지 않다. 정말로. 하지만 가서 아이가 문제가 생길 것 같았기 때문에 도저히 보낼 수 없었고. 정말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년이 되면 아이의 식탐은 더욱 강해질테고, 대체 도시락을 신경써 먹여주실 담임 선생님도 바뀔테니 더더욱 못 보낼 것 같아, 올해가 아이의 마지막 추수감사절 행사일수도 있는데 그것도 내가 뺏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그리고 출근, 마음을 떨어내고 오전 회의 중이었다. 내 발언 차례가 끝나고, 전화기에 어머니 이름이 떴다. 무슨 일인가 싶어 회의실에서 잠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우리 가족은 원래 업무시간에 전화를 잘 하지 않는다.
람이가 얼굴이랑 목이 벌개지고 만지면서 할머니한테 도와달라는듯 자꾸 쳐다보며 끙끙거려서 유시락스 어디있냐고 물어보는 전화였다. 지난 번 람이 급성 두드러기를 혼자 대처해본 적 있으시기 때문인지 어머니는 침착하셨고, 내 목소리도 차분했다.
비상약 알려드린 곳에 유시락스 알약과 시럽이 둘 다 있어 뭘 먹이냐는 전화가 한 번 더 왔고, 사건이 종료된 것 같아 안심하고 다시 회의에 집중하고 있는데 오 분 정도 뒤에 또 전화가 왔다. 콩닥거리면서 받았는데 10초가 넘도록 아무말도 없고 플라스틱 만지는 소리만 나길래 혹시나 해서 "람아???" 했더니, 바로 "엄마아~~~~~~~~???" 하는 람이 목소리가 들렸다. ㅎㅎㅎ 어찌나 해맑게 대답하는지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람아 사랑해~~~" "엄마~~~~???" "람아 사랑해~~~" "엄마~~~~~???"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할미라고 해야지 엄마라고 하면 어쩌냐는 친정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미~~?? 엄마~~??"의 퍼레이드는 "엄마 회의실 들어갈게- 사랑해. 할머니랑 잘 놀고 있어." 라고 인사한 뒤 전화를 끊으며 끝이났다. 사실 한 번 더 전화가 왔지만 람이가 전화기를 만지작거라다 우연히 건 것 같았고, 응급 상황은 끝난 것 같아 받지 않았다. 회의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람이가 나에게 처음으로 전화를 건 날이다!!! :)
추측컨대- 이번 알러지 반응은 정도가 약해 항히 약발이 잘 받았고, 아이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해 친정 어머니께서 아이에게 평소에는 절대 주지 않을 휴대폰을 주셨고, 람이는 평소 가지고 노는 피셔프라이스 폴더폰 장난감과 구조가 비슷한 할머니의 폰을 열어 버튼을 마구 누르다 최근 통화인 내 전화기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점심시간 이후에 통화를 하며 이 이야기를 전해드렸더니 친정 어머니께서도 재미있어 하셨다. 람이는 다행히 그 뒤에 바로 가라앉아서 낮잠 잘 자고 일어나서 밥 먹는 중이라고 하셨다. 알러지 원인은 꼬치전 하시는 중에 람이가 부엌 안전문 밖에서 하도 보채기에 계란 만지던 손을 물로 씻고 람이 과자 주셨는데, 그것 때문이 아닌가 하셨다. 비누를 사용해서 씻지 않아 제거되지 않은 소량의 단백질에 반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다. 지금까지 부엌에서 달걀을 사용해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놀라신 것 같았다. 다시는 람이 있을 때 계란 요리 안 하신다고 이번에 크게 하나 배우셨다고 하시는 어머니께 정말 죄송하고 죄송했다. 그리고 조금 서글펐다. 람이는 우유 반응 직후 피검사 결과를 보고 수치가 높은 달걀 식이제한을 시작한 것이라 실제 달걀을 먹어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다. 당시 의사 선생님이 달걀 문질러보지도 말라고 하시긴 하셨지만, 정말 알러지가 있는 걸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몸이 예민해진 상태라 평소보다 역치값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그래도. 올 것이 온 것 같은 기분과 함께, 달걀 알러지가 실은 없지 않을까 하는- 요행을 바랬다 실패한 만큼의 허탈감이 동시에 왔다.
하지만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는 않았다. 람이가 처음으로 엄마한테 전화 건 날이니까. :)
그 날 이후로 우리 집 잡채에는 달걀 지단이 없어졌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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