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상념의 문서화

휴가 후기. 버터 알러지 반응.

LEEHK 2012. 11. 11. 19:55

 

 

 

 

 

 

 

 

쉽지 않은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며칠간의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아이 간병 휴가를 쓰기에도 모자라는 시간을 여가의 목적으로 소비해도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았지만

단순히 놀러가는 것 만은 아니었기에 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람람이 두 돌 되기 전에 비행기 탑승을 시도한다.

2. 외부 음식점에서 람이에게 음식을 먹어본다.

3. 복직 후 여러모로 기력을 소진한 가족을 위로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 3번은 성공했고 2번은 실패했다.

 

 

고도가 올라가며 아이의 귀가 아플 것을 대비하여 주스와 물을 수시로 먹였다.

침을 의도적으로 삼키지 않고 멍멍한 느낌이 들 때마다 아이를 먹였다.

다행히 람이는 보채지 않았고 스튜어디스에게 눈웃음을 치며 비행을 무사히 마쳤다.

 

폐렴으로 입원했을 당시, 알러지 주의 문구를 길게 덧붙여 주문하긴 했지만, 병원식으로 세 끼 먹이며, 람이도 외부 음식을 먹일 수 있구나 자신감이 붙었다.

그래서 이번 여행도 음식을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려다 혹시나 하고 꽁꽁 얼린 람이 밥을 열두개나 챙겼다. 그리고 내내 그것만 먹일 수 밖에 없었다.

 

람이가 민감한 아이라 침구류 및 온습도 관리가 잘 될 것 같은 비싼 숙소를 잡았다. 첫 날 저녁에 숙소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육성급 호텔의 인당 칠만원이 넘는 부페에 가서 몇 가지 후보군을 집어 '유제품과 계란, 견과류'가 들어있지 않는지 직원에게 확인하고 먹였다.

그러나 입가에 두드러기 작렬. 콜린이 우수수 뜨고 긁어, 확인해보니, 올리브 오일로 구웠다는 감자가 사실은 버터 구이였다.

아이에게 주기 전에 먼저 먹어봤을 때 향이 묘해서 치즈가루인가 허브인가 물어보니 걱정말고 먹이라던 녀석이다.

지배인 뛰어나오고, 책임 주방장 뛰어나오고 굽신 굽신 사과받고, 식사는 중간에 중단하여 식대는 절반만 냈다.

그 식당 내부 커뮤니케이션 실수에 대한 분노보다, 아이의 알러지가 여전하다는 처량함이 더 컸다.

그래서 큰 소리 내어 싸우기도 그렇고 해서 차분히 대화 후 결제 문제 정리하고 나올 수 있었다.

 

 

당일은 가족 여행이기도 하여 내 감정보다는 동행인의 마음을 더 많이 돌보았는데, 그게 스트레스로 남아있었나보다.

아이 어린이집 가정통신문의 식단을 체크하던 중, 부활절 행사인 금요일 점심메뉴- 까나페, 치킨꼬치, 샌드위치를 보고 갑자기 마음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우리 아이에게 굳이 양파링 자갈치 등 슈퍼 과자나 라면같은 인스턴트를 먹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전문 조리사의 음식을 남들처럼 먹이고 싶을 뿐인데-

재료 좋고 조리에 시간을 들인 비싼 식당에 아이를 데리고 갔을 때 적당히 함께 먹일 수 있었으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 먹는 음식을 쳐다보고있지 않도록, 함께 먹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지나야 좋아진다는 것, 체득하여 알고 있지만 간혹 이렇게 모든 의욕이 떨어질 정도로 힘이 빠질 때가 있다.

 

 

 

 

 

여행 자체는 즐거웠다. 람이는 원래 스타병이 있는 아이라, 주변에서 귀엽다 하면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젊은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한 명씩 함께 사진 찍어주는 한류스타 노릇도 하고,

잘 웃고 잘 뛰고 잘 먹고 잘 싸며 즐겁고 행복해했다.

사실 이 아이는 비행기를 타지 않고 집 근처만 놀러가도 행복해하는 아이기에-

엄마 아빠가 둘 다 며칠 휴가를 쓰고 내내 함께 있어주며, 아이의 성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행복한 시간이었다.

 

 

 

 

 

마음은 즐겁지만 체력적으로 힘이 드는 시간이기도 했는데, 여행 중에도, 돌아온 뒤에도,

항상 한결같이 배려하고 챙겨주는 신랑님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더욱 깊어질 수 있어 또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람이가 순하고 잘 먹고 잘 싸고, 분리불안도 없고, 밝고, 어린이집 적응도 잘 하고, 낯도 가리지 않는다고,

양가의 사랑과 지원을 잔뜩 받아- 특히나 친정에 직접적으로 육아 도움을 받으며 직장생활을 하기에

내가 육아를 수월하게 하는 것처럼 다소 부러워하는?? 소수의 빈정댐??도 솔찬히 스트레스였나보다.

람이는 참으로 쉽지 않은 아이고-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그래도 종종 내 용량을 초과하는-

엄마의 역량과 한계를 시험하는 벅찬 아이이지만, 그래도 육아를 전적으로 함께 짊어지며,

개인적인 여가시간, 인간관계, 취미생활을 나와 동일한 수준으로, 금욕하며 가족을 돌보아주는 남편이 있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한다.

 

결혼 4주년 기념, 람이 2살 기념 여행- 무리한 만큼 보람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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