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이/생명을 기다리다

람이 탄생기. written by 엄마.

LEEHK 2011. 8. 19. 16:39

> 유도분만 실패. 퇴원.

 

자궁문이 2센티 열린 상태에서 일주일이 경과하고

양수가 위험 수치라고 분만실에 들어가 유도제를 맞으며

멍하니 이틀을 보냈다. 간호사만 간혹 들락 날락할 뿐

문 밖이 비명 소리, 탄생하는 아기들의 첫 울음소리는

남말이었다. 첫 날 밤 잠도 오지 않고 멍청해지는 기분.

다행히 덕배는 꾸준히 태동이 있었다. 둘째날 새벽 5시부터

다시 시작해도 여전히 아무 느낌 없었다. 진통이 뭐지?

먹는건가? 지루함 끝에 신랑이 삼국지를 하겠다며

랩탑을 가져온 순간 퇴원 결정이 내려졌다.

 

도저히 시동이 걸리지 않으니, 제왕절개로 가야할 것 같다는

의사의 말에 양수 양이 얼마나 위험한 지 보고 결정해달라고

했고, 어이없게도 담당의는 날 입원시켜놓고 휴진,

다른 의사는 양수 양이 아직 치명적이지 않다며

기다려보겠다는 나의 말에 퇴원 싸인을 해 주었다.

 

설날 당일에 입원 한지라 온 일가친척이 다 알고 있었는데

그대로 집에 오자 다들 웃고 말았다. 거의 굶은 상태라

집에 오자마자 와구와구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 진통 후 자연분만.

 

잠자리에 들었는데 이상하게 배가 싸르르 아픈거다.

설 연휴가 끝나 출근하는 신랑은 자게 내버려두고

작은 방에 건너가 시간 간격을 재는데

불규칙하게 왔다갔다 했다. 가진통인가 싶어

한참을 고민하며 신랑도 출근시키고 나서

아침 7시경,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께 태워달라 하고 어머니와 짐을 싸서 병원으로 갔다.

 

이미 분만 대기실 3일차 베테랑, 입원 준비물은

정말 훌륭하게 잘 챙겼다.

 

병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래를 찢는 듯한 진통을

처음으로 느끼고도 확신하지 못하다가

아침 10시경 신랑에게 전화했다. 도저히 가만히

누워있거나 앉아있을 수 없는 고통이 뼈를 울리고 있었다.

출근 후 월차를 쓰고 대중교통으로 산 넘고 물 건너

오고 있는 신랑을 기다리며, 시댁에는 아직 연락 드리지

못한 것은, 이틀이나 양치기 소년에 당했기 때문이었다.

 

12시경 신랑이 도착했을 때는 말조차 하기 힘든 상태였다.

차분히 잡지를 넘기며 옆을 지켜주시던 친정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더 힘들었을 거다.

나중에 들으니, 같은 페이지만 넘기고 계셨단다.

 

누군가가 직경 5센티는 넘는 날카로운 쇠파이프를

아래에서 정수리까지 꽂아넣고 헤집어대고 있었다.

소리조차 지를 수 없어 침대 난간을 부여잡고 이 악 물고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진통, 휴지기, 진통, 휴지기,

여전히 자궁 문은 사 센티였고 너무나 끔찍한 고통이

끝없이 계속 되고 있었다. 뼈와 살이 다 너무 아픈데

무통 주사를 맞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말 뿐,

2시쯤 양수가 터지고 나서 화장실 가서 옷 갈아입고

나오라는 조산사의 태연함이 더 무서웠다.

이게 아직 초반이라면 중후반은 어떻다는 거야!!

 

신랑의 부축을 받아 화장실에 가서 어찌어찌 손발을

끼워 넣고 난 뒤 진통이 찾아왔다. 변기에 앉아 온 몸에

힘을 주니 아래로 기운이 쏠렸다. 뼈를 헤집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대변을 보고 나면 시원할 것 같은 기분,

나올 것 같은데 나오지 않고 힘은 부족한 기분,

세네번의 진통을 변기 위에서 보내고 다시 침대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물었다. 아직 무통 안 되나요?

 

5~6센티는 열려야 무통 놔준다던 조산사는

손을 수욱 넣어보더니 다 됐네 를 외치며 분만실로 가자

하였다. 누군가가 이미 누워있던 분만실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고 들어가 누웠다.

극한 고통 속에도 이제 곧 끝이라는 안도가 가득했다.

누군가가 아래 면도를 하고, 내 스스로 다리를 끌어안게

시키더니 10셀 동안 힘을 주라 하였다.

중간에 숨을 쉬었다고 다시, 아직 부족하다고 다시,

이제 마지막이라더니 왜 자꾸 더 하는건가

점점 의식은 사라져갔다.

여러 명이 내 몸에 달라붙어 누르고 밀어냈다.

내 머리를 안은 것은 신랑이라던데, 전혀 모를 정도였다.

여러 번 힘을 주고 나서야 안 되겠다고 조금 도와주어야

겠다고 의사가 회음부 절개를 했는데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제 끝이라매 이제 끝이라매 계속 속다가

또 마지막이라는 말에 이를 악 물고

내 몸을 헤집고 다니며 소름끼치는 고통을 주는

쇠꼬챙이를 뼈와 뼈로 짓누르듯 힘을 주었는데,

갑자기 쇠꼬챙이가 스윽 사라졌다.

아래로 무언가가 후르륵 내려갔다.

 

소리도 안 지르고 어쩜 이리 산모가 우아할까 라는

의사의 감탄에 소리 질러봤자 힘만 빠지잖아요 라고

대답할 기력도 그제서야 돌아왔다.

 

너무 탈진하고 아파서 넋이 나가 있는 와중에

어머 이 애기 쌍커풀도 있어 라는 간호사들의 목소리,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덕배야 덕배야 우리 덕배야

신랑의 노래소리, 보통 아빠곰 엄마곰을 부르는데

여긴 특이하네 라는 의사의 웃음소리.

아기의 입이 내 젖꼭지를 스치고 지나가고,

보라색 발띠만 내 손에 남아 있었다.

 

태반을 뺀다고 배를 어찌나 세게 눌러대는지

아파요 아파요 호소했던 건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였으리라.

이불을 덮어주고, 링겔을 꽂고, 쉬라던 간호사의 말에

멍하니 분만실 천정을 보며, 그 소름끼치는 고통이

끝난다는 안도감과 희미하게 남아있는 여운 뿐이었다.

 

회음부 절개가 아무 느낌 없었던 것 처럼

회음부 절개부위를 봉합할 때도 못 느낄 정도로

인생 동안 최고로 심한 고통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병실에 올라가며 시간을 보니

거의 네다섯시가 되어 있었다.

다 됐다고 낳으러 가자고 하던 순간 부터

두 시간은 더 그 고통에 시달렸구나 하며

속은 기분이면서도 체감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 놀랐다.

 

 

 

시어머니와 시누이, 친정아버지와 남동생이 도착하고

아기가 왔는데 나에게는 보여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돌려보다가 내 애 나도 보고싶다고

소리를 한참 지른 후에야 덕배를 안아볼 수 있었다.

작고 조그맣고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생명체,

내 뱃속에서 이제 세상에 나왔구나 생각하니

울컥 눈물이 흘렀다.

 

 

그 날 저녁 회음부 봉합 부위가 너무 아파 울고불고

진통제 주사를 내놓아라 난리를 친 것과

너무 추워 오한이 들 정도로 덜덜 떨었던 것,

모자동실 둘째날 밤새 울어대는 람이에게

나오지도 않은 젖을 물려대며 달래는데

아빠가 되었다는 긴장감에 한껏 얼어서는

어쩔 줄 모르던 신랑. 밤새 아기를 달래주시며

거의 못 주무시던 친정어머니께 느끼던 죄송한 기분,

손가락으로 누르면 다시 복구되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은 다리로 길 건너편 산후조리원으로

향하던 길에 부담감과 막연한 두려움에 울던 날,

모두 지나고 나니 추억이다.

그리고, 산후조리원은 천국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