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재역 은광여고 방향으로 나와 육교를 향해 아래로 쭉 걷다보면 오른쪽에 노점상이 많다.
원래는 좁은 시장골목이 있었는데, 그 시장골목 양 옆 상가가 재건축 명목으로 철거되고 시장골목도 사라졌다.
좁은 시장골목의 저렴하고 맛있는 포장마차 선술집은 은광여고 올라가는 길의 일반 가게 순대국 집으로 이사했고,
좌판은 모두 차로변으로 나왔다.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들이 생선, 야채, 과일들이 잔뜩 늘어놓고 판매하고 계신다.
기록적인 폭설 며칠 뒤, 양재천 산책을 하다 흩날리는 눈발에 기겁하여 저녁이나 해먹게 장보러 가자 하고 방향을 틀었다.
양재천에서 차도를 따라 양재역까지 직진하고 길을 건너 아래 대형마트를 향해 걷고 있는데, 냉이 파는 좌판이 눈에 띄었다.
칠순은 훨씬 넘어 보이는 꼬부랑 할머니가 영하 10도 이하 추운 날씨 속에서 과도로 냉이를 다듬고 계셨다.
문득 우리가 가는 대형마트들이 소매상을 죽이고 저 할머니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바르게 자란 신랑은 몇 해 전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난다며 마음 아파했다.
결국 마트 앞에서 뒤로 돌아 다시 양재역 방향으로 걸어가 냉이 할머니께 냉이를 샀다.
2천원어치를 사려 했으나 "할머니 삼천원어치 주세요, 아니 그냥 오천원어치 주세요." 라고 점점 가격을 올리게 되었다.
혹한의 날씨에 겨우 비닐 한 장으로 감싼 좌판 안, 거뭇거뭇한 주름투성이 할머니의 손가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너무 추워 이제 그만 들어가려 하신다는 할머니는 가지고 있는 모든 냉이를 비닐봉지 속에 부어 주셨다.
집에 와서 냉이를 씻었는데, 세상에 냉이 뿌리의 흙 뭍은 부분을 하나하나 긁어낸 '정말 잘 다듬어진 냉이'였다.
냉이는 가느다란 뿌리 부분을 다듬는 공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쉽게 요리하기 어려운 채소 중 하나다.
할머니가 한 뿌리 한 뿌리 다듬어주신 덕분에 그저 세네번 물로 헹궈내기만 하면 바로 요리가 가능했다.
그 날 저녁은 시원한 냉이된장국에, 향긋한 냉이나물까지 정말 행복한 식사를 했다.
어제 오후, 산책을 나왔다가 다시 냉이 할머니 앞을 지나게 되었다. 여전히 열심히 냉이를 다듬고 계셨고 날은 추웠다.
"할머니 냉이 오천원어치 주세요!" 라고 말씀드리자. 수중에 있는 모든 냉이를 다 비닐봉지에 부어주셨다.
"소쿠리 안에 있는 게 이천원 어치인데, 소쿠리 밖에 있는 것들까지 다 해서 오천원!"
지폐를 건내드리며 "잘먹겠습니다!" 라며 나오자, 옆 좌판에 있던 아주머니가 "아이고 고마워요!" 라고 말씀하셨다.
신랑이랑 나는 부끄럽고 어리둥절하여 "감사합니다!" 외치며 도망치듯이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삘 받은 나머지, 조금 더 내려가면 있는 다른 좌판의 꼬부랑할머니께 가지고 계신 깐 마늘 전부 (4천 5백원) 와
가지고 계신 양파 전부 다 (5개 1천 5백원)을 구매했다. 마늘 할머니는 냉이 할머니보다 조금 더 나은 상황이었는데
좌판 주변을 감싸고 있는 비닐이 조금 더 두꺼웠고, 난방장치로 휴대용 가스버너를 약불로 켜놓고 계셨다.
하지만 이 추운 날 고생하시는 건 매한가지였다. 하루 매상이 많아봤자 5만원 정도 아니실까? 공치는 날도 있을테고.
좌판의 할머니들이 파는 야채가 실제 대형 마트와 가격이 비슷하다. 설사 좀 더 비싸다고 해도 몇 천원일 거다.
매달 외국에 있는 어려운 아이들을 도우려고 몇 만원 씩 내고 있다. 하루 술값으로 몇 만원씩 쓰고 있다.
어렵게 살고 계시는 꼬부랑 할머니들께 몇 천원 더 드리는 게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어제 구매한 냉이와 마늘과 양파는 대형 마트 야채에 비해서 가격도 품질도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착한 일 했다는 뿌듯함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겨우 몇 천원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다.
명품 가방 든 아주머니들이 좌판에서 일이천원 가지고 실갱이하는 건 솔직히 정말 보기 싫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속여서 바가지를 씌우는 것도 아닌데, 꼭 최저가 따져가며 일이백원 깎으면 좋을까?
많이 버는 자들은 그 만큼 사회에 환원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몇 천만원씩 기부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너무 이득만 보려고 살지는 말자는 얘기다.
냉이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냉이로 만든 냉이 나물은 세상에 둘도 없는 꿀맛이었다.
마늘 할머니에게서 구입한 마늘을 얇게 저며서 만든 마늘조림은 밥도둑이다.
앞으로도 야채는 모두 좌판에서 구매할 생각이다. 대형 마트는 공산품(맥주?^_^) 구매할 때만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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