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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리그. 보편적 복지. 그리고 펭귄.

LEEHK 2014. 6. 5. 02:11

이번 여행을 하며 펭귄과 참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우리는 알고 지낸 지 십오년 정도가 되었고, 거의 매일 소통하던 십여년 전만 하여도, 서로를 도플갱어라 칭할만큼 내면이 많이 닮아 있었다. 사고방식, 인간관계 성향, 가치관이 비슷하여 크게 전후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짧은 몇 마디에 쉽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꼭 필요한 만큼 신랄하게 조언하는 사이였다.

그 당시 펭귄이 했던 말 중에, 우리가 만약 사막에 떨어진대도 본인은 운이 좋아 오아시스 옆으로 떨어져 큰 고생 없이 살 타입이고, 나는 오아시스 옆에 가서 봉이 김선달처럼 물장사를 해서 도시를 세울 인간이라고 했다. :)

 

적으면 일이년에 한 번, 많아봤자 반 년에 한 번 정도 보면서, 언제 만나도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어색함 없이 지내왔다. 본성에 대한 이해도가 이 정도까지 높은 친구는 드물다. 그러다보니 이번만큼 서로를 밀착해서 지낸 적이 없다는 것을 여행 일주일 만에 깨닫게 되었다. 서로의 뿌리를 알고 있기에 오히려 디테일한 모습은 정말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비슷했던 아이들이, 십여년 다른 사회에서 다른 노력을 하니, 이렇게 방향성이 달라지는구나, 세월의 힘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펭귄은 남들이 하는 것처럼 공부를 하며 정해진 길을 밟으며 살아오지 않았다. 세계 도보여행을 다니며 내면에 대해 탐구를 하며 이십대 초중반을 보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독립심이 있고,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지만 맏딸의 책임감도 있다. 본인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다, 어느새 그 분야로 돈을 벌게 되었다. 공부-취업-결혼 이라는 일반적인 길을 걷는 아이들보다 삼십대가 더 빛나는 친구가 둘 있는데, 펭귄은 그 중 하나다.

 

펭귄은 정치적으로 굉장히 열려있고, 때문에 패배에 익숙하고, 세상은 쉽게 바꿀 수 없다는 무기력함과, 그래도 꾸준히 걸어간다는 인내심을 가진 빛고을의 딸이다. 동시에 이십대 초중반부터 수도권에 거주하며 사회적인 삶을 살아온 전형적인 요즘 진보적 젊은 세대이기도 하다. 방송국 일을 하며 종종 서울과 광주로 주거지를 옮겨다니는 펭귄은 두 사회가 심각하게 단절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사회적인 성향과 맏딸로서의 책임감이, 게으른 본성을 누르고, 항상 간당간당하지만 어쨌든 인생의 각 단계를 무사히 통과하여, 나름 열심히 꾸준히 격렬히 고민하며 살아가는, '그들만의 리그' 일원이다.

지난 대선 때, 선거 결과에 놀란 인터넷 세대들은 본인의 충격을 해소하기 위하여 원인을 엄청나게 파고들었다. 분명히 인터넷 상에서는 다른 후보가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는데, 결과는 놀랍게도 딴판이었다. 전략이 뛰어난 여당에서 일부러 몰아넣었든, 아니면 어리석은 엘리트 자만심에 젖어 주변을 둘러보는 시야가 좁아진 것이든, 분명한 건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이다. '뱅뱅이론' 이라는 말도 유행했는데, 이는 우리나라 청바지 판매 1위 브랜드는 뱅뱅이라는 의미로, 해당 브랜드는 유행이 지난 것 같다 느끼는 젊은 이들의 각성을 추구하려는 의도로 종종 사용했다. 리바이스 따위를 찾아다니며, 어쩌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넓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뱅뱅이라는 브랜드를 기억 저 편으로 넣어두고 있는 젊은 이들은, 그야말로 땅덩이 넓은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 대한 현저히 낮은 이해도를 가지면서, 주변만이 똘똘 뭉쳐 전부인 줄 아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세대 간 갈등을 지적하시며, 인구 비율을 언급하셨다. 점점 아기는 적게 태어나고, 노령 인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전국 투표에서 젊은이들이 연장자 층을 포용하지 않고 대립구도로 가는 이상 여당의 승리는 자명하다는 이야기셨다. 그 이후 종종 가족 술자리를 하며 아버지와 정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버지 세대를 이해해야 내 시야를 넓힐 수 있고, 그 세대를 설득하여야 세상을 바꿀 힘이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펭귄은 세대 내 격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는 젊은 세대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삶과 재미있는 삶을 동화시키려 애쓰며, 착해진다는 기분을 위해 종종 더 높은 금액을 지불하며, 기부 행위에 익숙하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는 것을 거부하기에 말초적인 소비가 잦고 인내심이 부족하다, 고인 물이 되어버린 현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거기에 나는 조직문화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였다. 1+1이 2보다 커지는 것이 조직의 묘미이고,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점을 메워주면서,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이루어내는 것이 조직 생활을 좋이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아이 엄마가 되다 보니, 현 국가시스템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나 두렵고, 세상을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바꿀 힘을 키우려면 자아성찰과 함께, 커다란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너른 시야와, 조직 생활을 통한 사회적 영향력을 키우며, 초심을 잊지 말아야겠다는 고민을 요즘 하고 있다고 했다.

 

 

 

 

펭귄은 일부는 동조했고, 일부는 내가 좀 특이한 사람이라 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만의 리그'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방에서 나고자라 수도권으로 오지 않는 젊은 세대 중에는 '사회적 기업'이라는 용어를 모르는 이들이 수두룩하며, 기부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고 했다. 왜 남들에게 돈을 주나라는 것이 밑바탕에 깔려있다고 했다. 더불어 조직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관점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큰 기업들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보니 지방에는 공무원, 은행 등을 제외하면 안정적인 직장이 적고, 대부분은 자영업을 하고 있는데, 자영업은 투입한 시간대비 소득이 낮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지고 사람들은 쉽게 지친다고 한다. 지방의 젊은 이들일수록 부모님들께 경제적인 원조를 받지 않는 이상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하고,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갖기 어렵다고 했다.

지난 대선 때 20대 투표 결과가 50대와 비슷한 이유를 분석한 내용 중의 하나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장기 불황이 되어 젊은 층의 취업 준비기간이 길어지고 있고, 부모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다보니, 정치적인 의견 역시 부모님들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해석이었다. 펭귄의 이야기도 비슷했다.

 

 

 

나는 항상 말하지만 운이 좋을 뿐이다. 적당히 공부해서 적당한 대학에 갔고, 마침 인연이 닿은 교수님 연구실에 들어가 감사하게도 직장생활과 대학원을 병행할 수 있었고, 논문 마감 후 마침 구인 공고가 뜬 회사에 이직하여 지금까지 다니고 있다. 중간에 육아휴직을 부담없이 받을 수 있고, 근속 년수에 따라 안식휴가를 받아 이번에 3주 정도 쉴 수 있었던 것처럼 삶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때때로 바쁘고 치열하지만, 맞벌이를 하는만큼 소득도 따라오고, 부동산은 소유하지 못했지만, 경제적으로 큰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운이 좋아 비교적 시급이 높을 뿐이지, 유산 계층이 아니기 때문에, 회사 구조조정 등 경제 불황으로 소득이 줄어들면 순식간에 빈곤층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걱정을 무의식 깊은 곳에서 수시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기는 싫기에 근검절약하며 살지 못한다. 자신을 위한 소비는 잘 하지 않으나, 가족에게는 아낌없이 돈을 쓰며, 양가 부모님의 부양 준비와 아이의 교육비 걱정, 자신의 노후 대비를 동시에 해결하려 한다.

그러다보면 사회 구조에 대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끊임없이 하게 된다. 세상을 바르게 돌려놓아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으며, 사회 어두운 곳을 지원한다. 남을 도우며 받는 정신적인 포만감과, 언젠가 저소득층이 될 때를 대비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사회를 미리 만들어두고 있다는 작은 안도를 느낀다. 순수하고 착한 마음도 물론 있겠지만, 절반 정도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한 일종의 리스크 관리다.

같은 직장 친구들은 그런 성향이 많다. 그런데 바로 이들이 '그들만의 리그'에 살고 있는 것이다.

 

 

 

 

지방의 젊은 이들과 인터넷 포털, SNS상의 여론은 온도차가 심하다고 했다. 지방 젊은 이들은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 가족과 가정에 대한 관심이 많으며, 정치 자체에 대해서도 급진적인 생각들을 이해하지도 않고.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저 내 주변만 보는 성향이 더욱 세다고 했다. 수도권의 젊은 이들은 세대 간 갈등을 불티나게 하고 있지만, 지방에서는 아직 부모님 세대가 대부분의 경제 활동 기반을 쥐고 있으며, 그 분들의 목소리가 높고, 젊은 이들은 수도권에 가서 머리가 커지기 전에는, 그런 사실에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했다. 오히려 인터넷 상의 정치적인 개혁의 목소리들을 "유난떠는"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본다고 했다.

 

 

 

 

잠깐 소화할 시간을 가진 뒤, 몇 가지를 펭귄에게 물었다. 나는 사회보장제도를 이타적인 보험과 같다고 생각한다. 만약 심장병 아동을 보살피는 재단에 정기 후원을 한다고 하면, 내 아이가 그 혜택을 받아내고자 하는 목적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로 건강상의 괴로움을 겪을 어떤 가여운 아이와 그 가족, 전혀 모르는 생판 남인 누군가를 위해서 소액이나마 금액을 지불하는 것이다. 유난스럽고 오지랖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라도 세상의 어두운 곳을 비추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운이 좋아 심적 물적 여유가 생겼다면, 그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마땅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반면, 단 한 번도 기부에 관심을 가진 적 없는 어떤 이들도, 만약 아이가 아프다면 심장병 재단에 지원을 요청할 수 있다. 이타적인 이들이 만들어놓은 사회 보장 제도의 혜택은, 주변에 무관심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도 부담 되는 치료비는, 평소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하더라도, 소득이 높다면 지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 이는 어쩌면 한없이 불공평한 일이다.

 

 

 

나는 복지란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금은 차등이어야 한다. 세금 내는 사람 따로, 혜택 받은 사람 따로여서는 안된다. 세금에 비례하여 혜택을 차별하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된다. 특히 기본적인 인권이나 아이들, 노인들처럼 사회 취약층을 상대로 하는 정책에서는 말이다. 같은 혜택을 주되, 많이 버는 이들에게는 더 많이 걷으면 된다.

하지만 기부와 같은 자발적인 행동은 세금처럼 의무가 아니기에, 본인의 생각을 바꾸는 계기가 있지 않은 이상, 그저 오지랖 넓은 일부가 전체를 위해 지속적으로 보장제도를 구축해나가는 수 밖에 없다.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어, 이것이 '그들만의 리그' 가 아니라 보편적인 정서가 되는 날까지. 운이 좋은 이들은 억울해하지 말고, 자부심을 느끼며 지속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만들어가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물질적으로 손해본다는 느낌을 상쇄하기 위한 감정적인 보상을 받기 위해, 선민의식을 느끼는 것은 타당한가. 그러다보면 이들이 또다시 '그들만의 리그'에 깊게 빠져들어버리는 것은 아닐런지. 걱정이 된다고 했다.

 

 

 

 

펭귄은, 시간이 지나면 결국 기부하는 문화라던지, 고인물을 흐르게 만드는 사회적인 개혁의 움직임도 지방으로 퍼져나갈 것이라고 했다. 다만 속도가 수도권과 지방은 현격히 다르며, 빠른 시간 내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고, '그들만의 리그'에 있는 이들은 더욱 격리되고 상처 받을 수도 있을 거라 했고, 나는 동의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 화두가 하나 떠올랐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 있는 이들이, 전체를 포용하며 너른 시야로 승부수를 걸기 위해서, 리그 바깥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을 것인가. 리그 밖의 이들은 인터넷에 글도 잘 안 올린다고 했다. 언론은 편집 방향에 맞춰 고정된 관점을 유지할 뿐이다. 세대 간 갈등은 부모님과의 소통을 통해 정리할 수 있지만, 세대 내 격리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떻게 길을 뚫어볼 수 있을까. 소재지 별 경제상황, 정치 문화의 차이가 있는 이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서울과 지방 간의 차이를 절실히 체감하고 있다는 펭귄에게 물었고, 그 아이는 대답하지 못 했다.